새정부 국정철학 ‘창조적 실용주의’라는데…

  • 입력 2008년 2월 19일 20시 02분


실용주의 철학이 주목받고 있다.

'이념보다 실용을 선택한 선거'로 평가되는 지난해 대통령 선거 이후의 일이다. 이명박 당선인이 이끌 차기 정부는 더 나아가 국정철학을 '창조적 실용주의'로 정했다.

인터넷에는 실용주의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답변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미국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에 대한 설명이다. 일부에선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한 도산 안창호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중국의 개혁을 이끈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를 실용주의의 사례로 꼽기도 한다.

차기 정부가 내세우는 실용주의의 의미를 놓고 공방도 벌어지고 있다. 비판론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경제 성장만을 추구하겠다는 방법론 아니냐"고 지적한다. 유우익 대통령실장 내정자는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16일 중앙공무원교육원 워크숍에서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는 휴머니즘, 합리주의가 뒤를 받쳤고 조선 후기 실학의 배경에도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큰 목표가 내재돼 있었다"고 말했다. '창조적 실용주의'에 철학적 깊이가 담겨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학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용주의 철학에는 '최고'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은 '실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는 생각에서 관념론에 맞선 철학이다. 대표 철학자인 존 듀이는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기존 철학계에 반기를 들었다. 듀이는 당시 소련과 중국을 방문한 뒤 사회주의적 정책도 필요에 따라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을 위해선 이념과 종파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선 군산대 학술연구교수는 "생활 개선에 도움이 되는 지식만을 가치 있는 지식으로 여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또 "우리가 실용주의를 추구한다면 항상 새롭고 진보된 것을 모색한 프래그머티즘의 사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네오 프래그머티스트로 꼽히는 리처드 로티의 명제를 소개했다.

로티는 "최선(最善)은 차선(次善)의 적일 수 있다(The best can be the enemy of the better)"고 말했다. 세상에 절대적인 '최상'은 없으므로 만약 '이것이 최상'이라고 규정한다면 독단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더 나은 것을 찾을 여지를 원천적으로 가로 막게 된다. 이같은 네오 프래그머티즘에 대해 이 교수는 "열린 태도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하며 상황에 따라 더 나은 정책으로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흑묘백묘론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의미.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말고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경직된 이념을 떠나 유용성을 추구 한다'는 측면에서 실용주의철학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이 교수는 "목적을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을 취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모두 포함한 구호"라면서 "프래그머티즘과는 거리가 멀다"고 평가했다.

∇한국적 실용주의의 역사와 미래=이 당선인이 지난해 대선 때 "도산 안창호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뒤로 도산의 사상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도산이 추구한 독립운동, 계몽운동은 철저히 실용주의적이었다"고 소개했다.

도산은 무력 투쟁을 주장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무실역행을 앞세워 실력 양성이 무력 투쟁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원은 "독립과, 독립 이후의 민주 국가 건설을 위해선 상인들은 돈을 모으고, 기술자는 기술을 단련하고, 의학도들은 의술 연마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게 도산의 사상이었다"고 설명했다.

도산이 내세운 실용주의의 특징으로는 중도적 자세를 들 수 있다. 이 연구원은 "도산은 이념 대결이 치열해지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선 모든 것을 내버리자는 뜻에서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주창했다"고 소개했다.

이 연구원은 도산의 또 다른 특징으로 유연성을 꼽았다. 상황이 변하면 그 상황에서 가장 실현 가능한 목표를 새롭게 정했다는 것.

도산의 사상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실용주의는 한국의 전통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철학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앞세우며 실생활에 도움 되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조선후기 실학이 한 예로 꼽힌다.

일본 도쿄도립대 객원연구원인 철학자 탁석산 씨는 더 나아가 "현세주의(現世主義)적 특성을 갖고 있는 한민족은 삶을 이롭게 하는 것, 즉 유용한 것이 진리라는 생각을 유지해 왔다"고 강조했다. 탁 씨는 "한국의 실용주의는 상황에 따라 시대의 과제가 무엇인지, 인생을 가장 즐겁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늘 따지면서 변화해 왔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탁 씨의 이같은 지적은 21세기 한국 실용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최고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유연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진지한 고민 없이 실용주의를 꽃피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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