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화재 ‘강 건너 불 보듯’ 했나

  • 입력 2008년 2월 22일 02시 56분


■ 세종로 정부청사 한밤 불 ‘안전 불감증’

9년전 화재 뒤에도 스프링클러 설치 안해

이달초 자체 점검때 불량전열기 사용 지적

경찰-소방당국 “누전-전열기구 과열 때문인듯”

《‘국보 1호’ 숭례문이 전소된 지 10일 만에 서울 도심의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발생한 화재는 공직 사회에 흐르는 안전 불감증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줬다. 정부중앙청사에는 숭례문과 똑같이 스프링클러 등 기본적인 자동 소방설비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최양식 행정자치부 1차관은 21일 “중앙청사가 1970년에 완공된 오래된 건물이라 스프링클러가 없다”며 “화재 경보 감지 장치를 통해 화재에 대비해 왔다”고 말했다. 특히 1999년 7월에도 중앙청사 4층에서 불이 나 사무실 한 칸을 태웠지만 9년이 지난 현재나 그때나 소방 설비나 대책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 시설도 의식도 안전 불감증에 걸린 ‘행정 1호’ 건물

청사 관계자는 “당시 화재 직후 스프링클러 설치가 검토되기도 했지만 리모델링 수준의 공사가 필요해 공사가 보류됐다”고 말했다.

화재 대응 또한 신속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화재를 처음 목격한 방호원 김모(38) 씨는 동료 방호원들과 주변 소화기로 자체 진화를 시도하다 10분 뒤에야 119에 신고했다.

소방 관계자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화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라며 “신고를 바로 했다면 피해를 줄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화재 예방 관리에 취약했던 공무원들의 안이한 의식 역시 화재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청사관리소가 5일 자체적으로 실시한 ‘설 연휴 특별방화 점검 결과’에 따르면 청사 내 일부 사무실에서 불량 전열기와 전기방석을 사용하는 등 화재 예방 조치가 미흡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당시 점검을 실시했던 방화관리자는 “사무실을 다니며 전기제품 전원과 플러그를 확인했는데 전원이 꺼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금지된 전기방석과 소형 전열기도 적지 않아 모두 회수했다”고 말했다.

청사 관리소 측은 “화재 예방을 위해 청사 내 개인 온풍기 등 전열기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직원들의 협조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국정홍보처의 한 직원은 “오후 6시면 중앙난방이 꺼지는데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찬바람이 잘 들어온다”며 “많은 직원들이 야근을 할 때는 개인용 전기난로를 사용한다”고 전했다.

○ 화재 원인은 누전 또는 과열

이날 현장 감식을 벌인 경찰과 소방당국은 누전이나 전열기구 과열을 유력한 화인으로 보고 있다.

종로소방서 관계자는 “사무실에서는 직원들이 전열기구를 켜두고 퇴근하는 바람에 불이 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화재 역시 전열기구 과열이나 담배꽁초로 인한 실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불이 난 504호 국무조정실 사무실에서 간이난로를 발견했다.

전기안전공사도 화재 현장에서 누전차단기가 작동한 사실을 확인했다.

공사 측은 “화재가 발생한 뒤 차단기가 제대로 작동해 전원을 끊은 사실을 확인했다”며 “차단기가 작동했다는 것은 누전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경찰도 “방화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며 “이날 0시경 퇴근한 직원과 다른 국무조정실 직원들을 불러 자세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 영상 취재 : 김재명 기자

▼컴퓨터 훼손… 정부 주요문건 소실 가능성

조직개편안 담당 국조실 혁신팀 등 피해… 업무 마비▼

정부중앙청사 화재로 504호 사무실의 책상 의자 컴퓨터 등이 손상되고 문서 일부도 소실됐다.

국무조정실은 21일 “화재 발생 당시 청사에서 근무 중이던 직원 32명은 신속하게 대피해 인명피해가 없었으나 국무조정실 혁신팀과 총무팀이 입주해 있는 504호 사무실 사무용 기기 및 컴퓨터, 책상, 종이문서 등 일부가 소실됐다”며 “중요 결재 서류 등은 전자결재시스템에 보관하고 있어 업무 처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무조정실 혁신팀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 관련 혁신안을 마련하는 등 핵심부서 중 하나라 아직 결재되지 않은 주요 문서가 소실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종이문서보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문서들이 문제이나 오늘 국가정보원 측에서 하드디스크를 살펴본 후 2, 3일 내에 대개 복원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일부 부처는 화재 피해 조사 등으로 업무가 마비되는 등 어수선한 하루를 보냈다. 중앙청사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5층엔 물이 흥건하고 불에 그을린 바닥을 닦아내는 등 하루 종일 어수선해서 전체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박명재 행정자치부 장관과 윤대희 국무조정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열고 정확한 화재 원인과 유사 사건 재발 방지 대책을 논의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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