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명이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극장 안에는 평양에서 보기 힘든 ‘특별한 국기’가 보였다. 무대 왼쪽에 걸린 미국의 성조기였다. 무대 오른쪽에는 북한 인공기가 걸렸다. 당초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측은 국기 크기를 같게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북측은 인공기에 비해 다소 작은 성조기를 걸었다.
뉴욕 필의 1만4589번째 콘서트이자 북한에서 처음으로 미국 오케스트라의 콘서트가 열린 날이었다.
○…공연은 평양 시민들에게 익숙한 북한 국가 연주로 시작됐다. 북한과 미국의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극장을 가득 메운 북한 주민과 방북단은 모두 기립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 씨는 첫 곡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전주곡 연주가 끝난 뒤부터 마이크를 잡고 연주곡목 대부분을 일일이 소개했다. “이렇게 훌륭한 극장에서 공연하게 돼 기쁘다”는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나간 그는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에 이어 조지 거슈윈의 ‘파리의 아메리카인’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누군가가 ‘평양의 아메리카인’을 작곡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본공연 세 번째 곡인 ‘파리의 아메리카인’ 연주가 끝나자 뉴욕 필은 조르주 비제의 ‘아를의 여인’ 모음곡 중 ‘파랑돌’을 시작으로 앙코르곡 세 곡을 연속 연주해 갈채에 화답했다. ‘파랑돌’이 끝나자 1층 중간에 앉은 방북단이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고 다른 관객들도 따라 기립박수를 쳐 열기가 한껏 고조됐다.
마젤 씨는 특히 ‘캔디드’ 서곡을 연주하는 순서에서 이곡의 작곡자이자 1950년대 뉴욕 필 음악감독을 지낸 선배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90년 작고)을 소개해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다.
그는 “번스타인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직접 지휘한 적이 많았다. 오늘 이 자리에 번스타인이 있다고 상상을 해보자”고 제안하며 한국어로 “마에스트로, 부탁합니다”라고 말한 뒤 무대에서 사라졌다. 뉴욕 필은 지휘자 없이 수석악장의 신호에 맞춰 ‘캔디드’ 서곡을 연주했다.
앙코르 마지막 곡으로 북한 관객에게 친숙한 ‘아리랑 환상곡’이 연주되자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단원들이 퇴장하는 가운데서도 일부 관객은 “브라보”를 외쳤다. 이에 퇴장했던 단원들이 다시 무대에 나왔고, 일부 단원은 눈물을 흘리며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공연이 끝난 뒤 마젤 씨는 기자들과 만나 “관객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에 진입했다”며 “이번 공연이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분기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계로 바이올린 파트 부악장인 미셸 김 씨는 “‘아리랑’을 연주할 때는 눈물이 났다”며 “북의 다음 세대는 더 좋은 상황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밤 공연 소식을 신속히 전하면서 “뉴욕교향악단(뉴욕 필)이 세련된 연주와 높은 형상력을 보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외신들도 이번 공연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일본 교도통신은 “이번 공연은 아직 전시(戰時) 상태인 양국 사이에서 이뤄진 사상 최대의 문화 교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은 26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것(뉴욕 필 공연)은 공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뉴욕 필의 공연이 북한 정권의 행태를 반드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공연이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마젤 씨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공연 불참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부시 대통령도 내 공연 때 온 적이 없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마젤 씨가 “북한의 뉴욕 필 초청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큰 실수가 됐을 것”이라며 “(초청을 수락하는 것 외에) 과연 다른 대안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