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십시일반의 취지가 좋더라도 섣불리 썼다가는 본전도 못 건진다. 노태우 정부 때 실세였던 박철언 씨가 자신과 친인척 등의 돈 170여억 원을 횡령했다며 모 대학 무용과 여교수 K 씨를 고소했다. 박 씨 측근은 “통일복지 분야의 재단법인을 만들기 위해 가족과 지인 등이 십시일반 모은 돈”이라며 ‘정치자금’이나 ‘뇌물’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펄쩍 뛴다. 그렇게 깨끗한 돈이라면 수십 개의 차명(借名) 통장으로 관리할 이유가 있었을까.
▷6공화국 당시 ‘황태자’로까지 불렸던 박 씨의 위세를 떠올리면 100억 원대 돈의 출처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설사 정치자금이나 뇌물이더라도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돈의 출처와 성격을 가려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1992년 4월 14대 총선을 앞두고 그의 대구 선거사무소는 정관재계(政官財界) 체육계 등 각계의 유력 인사들로 성황을 이뤘다. 그의 파워가 눈으로 확인되는 현장이었다.
▷박 씨는 김영삼 정부 때 슬롯머신업자 정덕진 씨 형제로부터 6억 원을 받은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했지만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김 전 대통령의 표적 사정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수사검사는 현재 한나라당 의원인 홍준표 씨다. 어찌했건 한 정권의 실세로 국회의원, 장관을 지낸 사람이 170억 원을 ‘십시일반’이라고 말하는 것은 ‘십시일반’의 상호부조(相互扶助) 정신과 크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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