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잘하면 예술이지만 못하면 혼돈이죠”

  • 입력 2008년 3월 28일 03시 02분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은 “정계건 학계건 사람 사는 세상인데 성실하게 일하면 통한다고 생각하고, 인수위에서 그대로 했다.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이종승 기자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은 “정계건 학계건 사람 사는 세상인데 성실하게 일하면 통한다고 생각하고, 인수위에서 그대로 했다.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이종승 기자
숙명여대 총장으로 돌아온 이경숙 前인수위원장

공천신청 철회하고 학교일 마무리하게 돼 홀가분

새 정부 희망-자신감 심어줬지만 組閣 검증 미흡

성실하게 일하면 통한다는 생각으로 인수위 이끌어 후회없다

이경숙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다시 숙명여대 총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수위원장 시절에는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됐고, 비례대표 발표 직전까지는 ‘1번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얘기를 들은 그였지만 왼쪽 옷깃에는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배지 대신 눈송이 모양의 숙명여대 배지가 빛나고 있었다. 17일과 27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용산구 청파동 숙명여대 캠퍼스에서 이 총장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화 안 나셨어요?

“화는 무슨…. 공천 냈을 때부터 학교 일을 깨끗이 마무리 짓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찜찜했는데 오히려 홀가분해졌지요.”

―전후 사정을 좀 설명해 주시지요.

“나라를 위해 할 일이 있을 것도 같아 한나라당에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했는데, 심사 과정 중에 교수들과 학교 문제를 논의하면서 찬반 양론이 있어 고민이 깊어졌어요. 그렇게 2주가 지나면서 새 학기를 준비하다 보니 아무래도 마무리를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하지만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해서 가만히 있었지요. 그러던 차에 한나라당에서 외부인사를 영입해 1번을 맡긴다는 얘기가 나오기에 ‘이때다’ 싶어 공천 신청을 자진 철회하게 된 것입니다.”

―속았다거나 망신당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위 분들 가운데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사와 공천 실패로 높은 지지 속에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시집보낸 딸이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심정입니다. 대통령은 바뀌었는데 정부 체제는 아직 바뀌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긍정적으로 개선돼 나갈 것으로 봅니다.”

―4·9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이 적전분열(敵前分裂) 모습인데요.

“바람직하지 않고, 국민 보기도 민망합니다. 정치는 잘하면 예술(Art)이지만 잘못하면 혼돈(Chaos)이 될 수밖에 없지요. 공천심사위 구성부터 정치력을 발휘해서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고, 원칙과 기준도 정해야 했는데 그런 준비가 안 돼 있던 것 같아요.”

사진 촬영을 위해 교정으로 나서자 학생들이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갖고 몰려든다. 그는 “내가 이래서 대학으로 다시 오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라는 무대에서 내려온 소감은….

“‘정계건 학계건 사람 사는 세상인데 성실하게 일하면 통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후회는 없어요.”

―이 대통령을 도와 새 정부의 주요 밑그림을 짠 처지에서 현 정부 초기를 평가하신다면….

“무엇보다 국민에게 희망을 갖게 한 것은 잘했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스스로 열심히 하면서 ‘우리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자신감을 심어준 게 고무적입니다. 조각 과정에서 검증 시스템에 일부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정치학자로서 이 대통령의 ‘정치 행태(Political Behavior)’는 어떻게 보십니까.

“이 대통령의 행동을 가까이서 관찰해 보니, 무엇을 하든 몸에 배어서 자연스럽게 하시는 것이지 작위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1절 행사 때 대통령 전용 단상을 치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대통령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같은 6·3세대여서 대학 시절에도 이름 정도는 알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일을 같이 한 것은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부터죠. 당시 정부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지방 대학에 우선적으로 연구비 배정을 하겠다고 해 저를 비롯한 몇몇 수도권 대학 총장이 ‘이명박 서울시장’을 찾아갔고, 그 후 청계천, 버스교통체계 개편 과정 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즘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권)이란 말이 유행입니다. 소망교회에서 이 대통령과 가까이 지내셨나요.

“교회에서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 대통령은 장로시고 저는 권사지만, 저는 주로 오전 9시 반에 시작하는 2부 예배에 갔고 이 대통령은 오전 7시 반에 하는 1부 예배를 보셨다고 해요. 이 대통령이 1부 예배를 보셨다는 것도 신문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 대통령이 보완할 점이 있다면….

“좀 쉬시면서 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이 대통령은 일이 취미이자 활력소인 것 같아요. 대통령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쉬라고 하지만 아랫사람으로서는 쉴 수가 없는 것 아니겠어요.”

―인수위 핵심 과제라면 정부조직 개편, 규제 완화, 대입 자율화 3단계 방안 등이 있는데 이 중 정부조직 개편은 정치권과의 사전 조율 미비 등으로 진통을 겪었습니다.

“시간에 쫓긴 게 문제였지요. 정부조직 개편을 급하게 서둔 것 같지만 인수위 출범 전부터 18개 기관에서 만든 20개 안을 놓고 장단점을 분석 중이어서 큰 문제는 아니었죠. 그런데 어느 부처가 ‘살고 죽는’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만큼 보안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대담=오명철 전문기자

정리=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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