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先요구 後지원’ 원칙 바꾸나

  • 입력 2008년 5월 16일 03시 14분


북핵협상 급진전… 美, 대북 식량 지원 방침…

북핵 문제의 진전과 미국 정부의 대북 식량 지원 방침에 따라 우리 정부의 대북 식량 지원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북-미 간 협의는 북핵 협상과 대북 식량 지원이 연계되는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 정부는 그간 대북 식량 지원과 관련해 ‘북한의 요청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강조해 왔는데 최근 미국의 흐름과 ‘호흡’을 맞추려다 보니 고민스러운 상황이 됐다. 북한의 요청이 없는데 먼저 식량 지원에 나설 수도 없고, 마냥 가만있을 수도 없기 때문. 정부로서는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동시 다발적 대북 식량 지원 언급=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5일 오전 10시 20분경 “여건이 되면 언제라도 대북 인도적 지원에 나설 것”이라며 “국제기구를 통한 원조나 미국의 대북 식량원조에 참여하는 방식은 검토되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외교통상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오전 11시 대북 식량 지원과 관련해 기자 간담회를 요청했다. 이 당국자는 ‘북한의 요청이 있어야만 대북 식량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게 원칙인데 북한의 요청이 없다’고 지적하자 “원칙이라는 것은 원칙일 뿐”이라고 했다.

이 당국자는 ‘국제사회에 북한이 식량난을 호소하면 지원 요청이라고 볼 수 있느냐’란 말에 “코멘트 하지 않겠다”며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식량 지원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도 이날 대북 식량 지원과 관련해 “북한과 기회가 되면 직접 협의를 할 생각”이라며 “(주무부처인) 통일부에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종합해 보면 정부는 곧 재개될 미국의 50만 t 대북 식량 지원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되 북한에 직접 식량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란 말로 풀이된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그간 고수해온 ‘원칙’에서 벗어나 좀 더 유연하게 대북 식량 지원 방안을 모색 중이란 것”이라고 했다.

▽북핵과 연계된 식량 지원이 고민 이유=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은 13일 미국 정부가 현재 구체적인 대북 식량 지원 계획을 조율하고 있으며 수일 내로 ‘모종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이와 관련해 “미국이 세계식량기구(WFP)와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50만 t을 지원한다는 원칙이 사실상 마무리된 상태”라며 “구체적 협의를 위해 미국 측 전문가들이 추가 방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이 1만8000쪽에 달하는 북핵 자료를 제공하는 이른바 ‘핵 신고 북-미 협의’에서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핵 신고와 대북 식량 지원은 별개의 트랙으로 가다 1만8000쪽짜리 자료 제출을 계기로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남북관계, 북핵 협상 진전, 미국의 대규모 식량 지원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향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13일 워싱턴에서 미국 측과 대북 식량 지원과 관련된 협의를 진행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야당은 물론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 여당이 “북한에 식량 제공 문제를 조속히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도 정부로서는 상당한 압박이다.

▽정부 정책 일관성 지켜야=정부는 미국이 대규모 지원을 하는 것을 계기로 WFP 등 국제기구를 통해 일정 규모(3만∼5만 t)의 식량 지원을 독자적으로 한 뒤 북핵 상황 진전 등 여러 가지 상황 변화 가능성을 지켜보며 직접적인 대규모 식량 지원 가능성을 타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가 대북정책의 원칙을 바꿨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대북 관계는 긴 흐름을 갖고 지켜봐야 하는 사안인데, 우리 정부가 북한의 지원 요청이 있기도 전에 미리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한 외교 전문가는 “북한에 ‘남측의 쌀을 맡아 놓고 있다’는 식의 태도를 심어준 지난 10년의 정권과 새 정부의 정책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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