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오물 투척사건… 의원 꿔주기…정쟁으로 얼룩져
파란 13대땐 첫 여소야대… 16대땐 대통령 탄핵사태
대한민국 국회가 31일로 개원 60주년을 맞았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부터 29일 종료된 17대 국회까지 우리 국회는 전쟁과 혁명, 헌정 중단, 대통령 탄핵 등 굴곡진 현대사의 중심에 서있었다.
우리 국회는 미시적으로는 온갖 비난과 추태로 얼룩졌지만 60년 동안 ‘민주주의를 향한 홍역’을 치르면서 꾸준히 발전해 왔다.
제헌국회부터 17대 국회까지 영욕(榮辱)의 국회사(國會史)를 조망해 본다.
1948년 7월 1일 제헌국회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내각책임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의결 공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우리 헌정사가 시작됐다.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을 제정하고 1948년 10월 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해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섰으나 이승만 대통령 및 친일파 경찰 간부들의 반발로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개원 한 달도 못돼 6·25전쟁으로 ‘전시 국회’가 된 2대 국회에서는 제정된 지 4년도 채 안 된 제헌헌법이 개헌되는 사태를 겪는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은 대선을 한 달 남기고 야당은 물론 여당이던 자유당 일부 의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를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변경했다.
3대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안을 둘러싸고 이른바 ‘사사오입’ 파동을 겪는다.
정부의 3선 금지조항 폐지 등을 골자로 한 개헌안이 재적의원 203명 중 135명 찬성으로 의결정족수인 136명에 1명이 부족해 부결되자 자유당은 ‘의결정족수인 재적의원 3분의 2는 135.33명이고, 0.33이란 자연인은 없으므로 의결정족수는 135명’이란 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4대 국회는 1960년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으로 인해 4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년 1개월 28일 만에 막을 내렸으며, 대통령중심제로 운영돼 온 권력체제를 처음 내각제로 바꿨다.
5∼9대 국회
4·19혁명으로 출범한 5대 국회는 의정 사상 처음으로 양원제로 운영됐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에 의해 9개월 18일 만에 막을 내리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쿠데타 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기구로 국회를 대신했으며, 이로 인해 처음으로 헌정 중단 사태를 맞기도 했다.
6대 국회에서는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처리 문제로 여야가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국내에서는 대일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에 있어 한국 측이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으며 계속된 학생시위에 이어 한일회담 반대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1966년에는 김두한 의원이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문 도중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해 제명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7, 8대 국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둘러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여야는 8대 국회 초반부터 국가비상사태선언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처리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1년 3개월 17일 만에 8대 국회가 해산되기도 했다. 해산된 국회 역할은 ‘비상 국무회의’가 맡았다.
이 같은 갈등 끝에 ‘유신헌법’에 기초한 9대 국회가 1973년 3월 12일 출범했다.
9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추천된 인사들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유신정우회’가 등장했다.
9대 국회부터 국회 본청이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영등포구 여의도로 이전했다.
10∼14대 국회
유신 막바지인 1979년 3월 문을 연 10대 국회는 짧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2·12쿠데타, 5·18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최대 격변기를 경험하는 비운을 겪었다.
10대 국회는 결국 12·12쿠데타 이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에 그 역할을 물려주고 세 번째로 헌정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는다.
전두환 대통령의 서슬이 퍼렇던 11대 국회는 국보위의 정치활동 규제로 사실상 정당 활동이 위축된 시기. 민한당 한국당 등이 창당되고 일부 정치인의 정치활동 규제가 풀렸으나 정국은 전 대통령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주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오랜 민주화 항쟁으로 12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남북 간 국회회담을 추진했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을 계기로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해 ‘체육관 대통령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이후 거센 민주화의 물결로 첫 여소야대 정국을 이룬 13대 국회에서는 16년 만의 국회 국정감사 부활로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이른바 ‘청문회 스타’ 의원들이 배출됐다.
당시 5공 비리 청문회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증인으로 출석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4대 국회에서는 12·12쿠데타에 대한 국정조사권이 발동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사실이 국회 대정부 질의 과정에서 폭로돼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등 일대 파란이 일었다.
15∼17대 국회
15대 국회에서는 당시 건국 이래 최대 권력형 금융부정 및 특혜대출 사건이라는 ‘한보사태’로 돈을 받은 정치인 및 전직 은행장 등 10여 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렸으며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도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사상 초유의 ‘의원 꿔주기’ 사건도 벌어졌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DJP(김대중 김종필) 공동정권의 한 축인 자민련이 17석밖에 얻지 못하자 당시 민주당은 소속의원 3명을 자민련에 입당시켜 교섭단체(20명 이상)를 구성하게 했다.
16대 국회에서는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돼 국무총리, 감사원장,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에 대해 국회 동의를 요구하거나 국회에서 공직자들을 검증했다.
2003년부터는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등도 인사청문 대상에 추가됐다.
17대 총선을 한 달여 앞둔 2004년 3월 12일에는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발의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정 사상 최초로 가결돼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는 사태를 빚었다.
그러나 탄핵소추안은 결국 헌재의 기각으로 무산됐고 이어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에 힘입어 당시 열린우리당이 전체 299석 중 152석을 차지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17대 총선에서는 처음 도입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17대 국회는 13대 국회 이후 처음으로 여대야소로 시작됐지만 안정된 국정 대신 정쟁으로 점철됐다.
2004년 12월에는 국가보안법(폐지안)과 과거사법, 사립학교법, 신문법 등 소위 여권의 ‘4대 개혁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진통을 겪었으며 국회 후반기에는 국민연금법, 사학법, 로스쿨법 등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여야 간 대립은 더 날카로워졌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