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물가 성장 투자 국제수지 등 악화일로
사회 촛불에 파업까지… 구호 앞에 법치 실종
정치 ‘거리의 정치’에 대의민주주의 흔들려
《한국 사회가 거대한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다가오는 도전이다. 먹구름은 이미 한반도를 덮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이를 극복할 총체적 역량을 결집하기는커녕 내부의 위기로 인해 스스로 주저앉는 듯한 무기력한 모습이다. 한국 경제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15일 본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현 상황은 1, 2차 오일쇼크와 외환위기에 맞먹는 위기로 발전할 소지가 크다”며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즉 빠져나가기 힘든 거대한 해일이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다가오는 형국”이라고 진단했다.
석유 곡물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의 폭등과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인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이 겹치면서 성장 물가 고용 국제수지 외채 등 국내 경제지표가 악화 일로를 걷는 등 민생이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계적으로 폐쇄적 지역주의가 힘을 얻어 한국과 같은 교역형 국가에 큰 도전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전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배타적 민족주의를 키워 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갈등을 조정해 사회적 통합을 이뤄내야 할 정치는 제 기능을 못하고 무기력하게 상황에 끌려 다니고 있다.》
위기는 중국과 인도 등 거대한 인구의 국가들이 급성장하면서 원자재 값이 치솟고, 세계의 중심축인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흔들리면서 달러 가치가 떨어져 자원 가격 상승을 더욱 부추기면서 시작됐다.
미국과 유럽 등의 싱크탱크들은 “세계의 부(富)가 제조업 중심 국가에서 자원보유국으로 이동하는 글로벌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런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켜낼 방안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일본은 고유가, 곡물가 상승, 지구온난화를 지구촌 차원에서 직면한 ‘삼위일체 위기’라 보고 내달 7일 홋카이도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도 이를 주요 의제로 삼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런 심도 있는 고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사회 각 주체가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보호주의나 희생양 만들기의 퇴행(退行)적 양상을 보일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개혁을 공언한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노조, 교육, 보건 분야의 각 세력은 현재의 국면을 개혁프로그램을 좌초시킬 기회로 이용하고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이런 움직임에 굴복해 공기업개혁 후퇴 조짐을 보이고 있다. 김만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지적대로 “고통분담과 경제체질의 효율화 외에는 답이 없는데 모두가 문제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위기는 ‘대의(代議) 민주주의의 실종’으로 더욱 증폭되고 있다.
국민의 건강권 차원에서 시작된 촛불집회는 각종 정치운동이나 정치 파업과 연결돼 ‘거리의 정치’ 정국을 불러왔다. 법치(法治)가 무너지고 있으며 합리와 이성, 과학적 판단은 실종되고 선동과 불안감, 대중심리와 정파적 이해(利害)가 상황을 지배한다. 화물연대 파업은 건설노조 파업과 민주노총 총파업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파업 정국을 확산시키고 있다.
대선과 총선이라는 합법적, 대의적 절차를 통해 확인된 민의(民意)가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운 거리의 정치 앞에 무장해제당한 것이다. 민의를 수렴하면서 비이성적인 주장을 걸러내야 할 국회는 역할을 포기한 채 촛불집회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18대 의원들이 세비를 받기 시작한 지 보름이 넘었지만 국회는 문도 열지 않았다. 위기극복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청와대와 정부는 위기대책보다는 쇠고기 대책과 인사개편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최근 촛불집회가 특정 단체들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일반 시민의 참여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촛불에 혼입된 정치색과 반미 구호, 노동계의 요구 등에 대한 찬반도 거세다.
한국호(號)는 다시금 마음을 모으고 방향을 바꿔 선진화 항로로 복귀할 것인지, 선진사회 진입의 문턱에서 침몰하고 말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 사회가 내부의 위기를 수습하고 외부의 도전에 대응책을 찾아 나갈 것인지 여부가 이제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이병기 기자 eye@donga.com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이훈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