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묵언(默言) 수행 중이다. 단순히 경북의 사찰이 마련한 수련 프로그램인 ‘깨달음의 장’을 찾아 1주일간 머무는 등 정진하고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 대중과의 접촉도 줄이고 언론을 통한 ‘말의 정치’도 삼가고 있다.》
지난해 대선과 4·9총선에 잇달아 패배한 그는 통일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대통령 후보를 지낸 참여정부 시절의 화려한 기억을 접어야 함을 직감하고 있다.
정식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그는 19일 비서를 통해 “아직 공식 접촉한 언론이 없다. 양해해 달라”는 답을 보내왔다.
이재경 공보특보는 “정 전 장관은 12년 정치인생에서 선거를 11차례 치렀거나, 주도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처음으로 무대에서 내려와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정 전 장관은 연수차 7, 8월경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계획이지만 아직 머물 장소를 확정하지 않았다.
야당의 대표주자가 보이지 않는 2008년 상황은 정 전 장관이 언제 어떻게 복귀하며, 과거와 같은 ‘잠재 대선후보’의 위상을 되찾을 것인지 묻게 만든다.
하지만 정동영 캠프에서 ‘복귀’라는 말은 금기다. 참모들은 “떠나기도 전에 어떻게 그런 말을…”이라며 손사래부터 친다.
통합민주당 내에서 정 전 장관의 입지는 부쩍 줄었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정동영 계보 의원들이 4·9총선에서 대거 낙선했거나 공천조차 못 받았다. 멸문지화(滅門之禍)라는 말도 돌았다. 일부 참모가 “의원 수로 계보의 위축을 말하기 어렵다. 7·6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 대표 후보자들은 정 전 장관의 밑바닥 조직에 구애작전을 펴고 있다”고 반론을 펴고 있기는 하다.
세(勢)를 불려가는 옛 민주계 출신들이 2003년 분당 이후 갖게 된 ‘정동영 반감’을 넘어서고, 노무현 정치의 수혜자였다가 막판에 반기를 든 탓에 생긴 친노 386그룹의 응어리를 풀어야 하는 과제도 있다. 한 참모는 “지난해 4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마주한 적이 없다. 정 전 장관의 도미(渡美)에 앞서 전화통화가 성사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난제들은 민주당에서 그의 복귀를 위한 정지작업을 도울 세력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첫 정치 휴지기를 맞은 그에게 변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너무 깔끔한 자기관리 때문에 오래된 참모들조차 “말을 붙이려다 멈칫할 때가 있다”고 할 정도다. 화려한 언변이 압도하는 바람에 생긴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이미지도 벗어나야 한다.
정 전 장관은 요즘 ‘내가 꼭 (대통령을) 해야 하나’라는 말을 한다고 전해진다. 한 측근은 “그가 유연해졌다. 그러나 대통령의 필요조건인 ‘권력의지’만큼은 여전하다는 걸 느낀다”고 귀띔했다.
최근 한 참모는 정 전 장관에게 ‘리처드 닉슨의 재기’에 대해 보고했다. “닉슨은 1962년 선거 패배 후 언론의 외면 속에서도 동서양 역사서를 품고 세상을 찾아다녔다. 이런 숙성과정을 거쳐 4년 뒤 총선유세 지원을 위해 일선 복귀 기회를 잡았다”는 취지였다.
8년간 부통령을 지낸 닉슨은 1960년 말 대선에서 존 F 케네디에게 패했다. 1962년 다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한 점이 정 전 장관의 상황과 비슷하다.
측근들은 조심스럽게 ‘2010년 지방선거 역할론’을 말한다. 전국적인 지원유세를 당에서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기회가 올 것이란 말이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강하고 비전 있는 정치인으로 변신하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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