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바로 하면 현행헌법 20년은 더 가”
“헌법은 정치규범인데 정치가 헌법을 무시해 왔기 때문에 헌법질서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제헌절 60주년을 하루 앞둔 16일 허영(전 연세대 교수) 헌법재판연구소 이사장은 “국민의 준법의식이 매우 미약하다. 모범을 보여야 할 권력 있는 사람들, 돈 많은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만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낮 서울 강남구 역삼동 헌법재판연구소 사무실에서 허 이사장을 만나 한국 헌법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헌법이 만들어진 지 벌써 60년이 됐다. 헌법 질서가 자리 잡았다고 평가하나.
“1987년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현행 헌법이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헌정 질서가 정착되지 않아 대단히 아쉽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는 3당 합당으로 국민이 선거를 통해 만든 정치구도를 인위적으로 바꿨다. 대의민주정치의 기본 틀을 흔든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는 군사독재정권 청산을 위해 무리한 소급입법을 하는 등 헌법 정신을 무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 씨를 국무총리로 만들기 위해 김 씨를 헌법에도 없는 총리서리를 시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한 법조인임에도 ‘그놈의 헌법’이라고 하더니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그만두게 한 뒤 헌법재판소 소장에 임명하려고 했다. 또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공적 임무를 무시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법 위반 경고에 대해 말도 안 되게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제헌 당시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은 뭔가.
“민주공화국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속에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개념이 들어 있다. 그동안 헌법이 9번 바뀌어도 이 개념은 바뀌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 존중과 대의민주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등장하고 있다.
“(촛불시위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대선과 총선 결과를 부정하기 위해 헌법 제1조를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끌어 붙이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최근의 촛불시위에서도 헌법을 무시하는 양상이 나타났다고 보나.
“촛불시위가 쇠고기 문제로 불거졌지만 그 성격 자체가 대선에 승복할 수 없다는 선거 부정 운동이었다. ‘정권 퇴진’ ‘탄핵’을 외치며 갓 태어난 정부를 상대로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직접민주주의의 시대가 왔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도시국가인) 그리스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다. 인터넷에 접근이 어려운 나이 많은 세대는 무시해도 좋은 것이냐.”
―불법 시위를 막아야 하는 공권력이 무력했다는 지적도 있고, 반대로 과잉 진압 주장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법치국가다. 집회와 시위를 규율하는 법이 정치적 성격의 야간집회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촛불시위는 정치적 성격을 띠었고, 따라서 허용이 안 되는 집회였다. 그렇다면 경찰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누리꾼들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 광고주를 협박하는 사태가 빚어졌는데 헌법의 잣대로 이를 평가한다면….
“극소수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 의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 혁명적 발상에 대해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기록물 유출 문제를 놓고도 불법 논란이 일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기록물 열람권은 일반 국민보다 편리하게 열람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전직 대통령이 재임 시절 기록을 몽땅 가져가는 열람권은 지구상에 없다. 노 전 대통령이 법을 무시하겠다는 것이다. 법조인인 대통령이 법을 교묘하게 악용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치권 일각에선 개헌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헌법은 절대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게 아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 그중 하나가 대통령 단임제다. 대통령을 뽑았으면 임기 중에 한 일에 대해 국민에게 심판할 권리를 줘야 한다. 심판권을 박탈하는 게 단임제다. 또 대통령을 뽑을 때 절대다수 득표자로 뽑아야 한다. 1차 투표에서 안 나오면 결선 투표를 해서 과반수 득표자가 대통령이 되도록 해야 한다.”
―개헌 논의는 언제 시작돼야 하나.
“지금 개헌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다. 영토조항 개정 등 개헌 문제를 꺼내 왈가왈부하다 보면 사회는 완전히 분열된다. 일단 경제위기를 넘기고 시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한 뒤 개헌을 해야 한다. 사실 정치인들이 정치를 올바로만 한다면 현행 헌법으로 20년은 더 갈 수 있다.”
::허영 이사장은
△1936년 충남 부여 출생 △1959년 경희대 법학과 졸업 △1971년 독일 뮌헨대 법학박사 △1971∼1972년 독일 자르브뤼켄대 조교수 △1982∼2001년 연세대 법학과 교수 △1996∼1997년 한국공법학회 회장 △2001년 뮌헨대 초빙교수 △2002년∼명지대 법학과 초빙교수 △1988년∼헌법재판소 자문위원 △2007년 독일 본대 명예 법학박사 △2007년∼허영헌법재판연구소 이사장 △저서 ‘헌법이론과 헌법’ ‘한국헌법론’‘헌법소송법론’ 등 다수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