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유산인 햇볕정책을 수정하려고 모색해온 이명박 정부엔 ‘결정적인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0년간 금강산 관광 대가로 북한에 지불한 4억8602만 달러(6월 기준)가 박 씨의 아까운 생명을 앗은 흉탄으로 되돌아온 셈이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많은 국민이 자신의 일인 양 햇볕정책의 부작용을 절감하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친북 성향의 시민단체들조차 이례적으로 북한에 사과를 요구한 것도 대북 여론이 심상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놓고 대척점에 서 있던 보수와 진보가 한목소리로 북한을 규탄한 것은 분단 이후 역사에서 흔치 않은 장면이다.
북한은 사건 발생 초 책임을 남측에 전가하던 태도를 바꿔 최근엔 총을 쏜 군인이 ‘17세 여성’이라는 정보를 흘리며 우발적인 사건이었음을 애써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또 다음 달 평양에서 열리는 아리랑 공연과 백두산 관광에 많은 남측 인사들이 참가해 줄 것을 비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만 해도 남측의 옥수수 5만 t 지원 제의를 거절하며 ‘이명박 정부 길들이기’를 꾀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북한 체제를 지탱시켜 준 남측 지원이 끊기거나 축소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불길한 예감은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 햇볕정책은 기사회생이 어려운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의 선택이다. 정부는 북한의 도발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에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모처럼 결속한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일방적인 대북 퍼주기 등 과거의 잘못된 대북정책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북한을 압박만 해서는 북-미관계와 6자회담의 진전 등 국제사회의 흐름에 역행할 수 있다. 한승수 국무총리가 21일 국회에서 “이번 사건과 전반적인 남북관계를 분리하겠다”고 한 것은 그런 고민 때문일 것이다. 박 씨 사망엔 단호히 대응하되 남북관계가 완전히 파탄나지 않도록 11월 미국 대선 결과까지 염두에 둔 치밀한 복안(腹案)을 마련해야 한다. 기존의 대북정책 중 좋은 것은 계승하는 실용적 태도도 필요하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런 일을 하라고 국민은 혈세를 낸다.
북한은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남북 공동조사에 협력하고 진솔하게 사과해야 한다. 또 각종 남북교류가 안전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합당한 보완조치를 취하고 당국 간 대화를 복원함으로써 이 사건이 남북관계에서 전화위복이 되도록 성의를 보여야 한다. 악수(惡手)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사건을 수습할 방법은 없다.
무엇보다 개방과 개혁 없이는 남측의 따뜻한 햇볕이 ‘좋았던 그 시절’의 추억이 될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박 씨가 다시 살아날 수 없듯이 북이 변하지 않는 한 햇볕정책도 옛 모습대로 부활할 수는 없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