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안에도 ‘10·4정신’ 北 요구 포함…“그럼 다빼자”

  • 입력 2008년 7월 28일 02시 58분


무슨 얘기 나누기에…24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15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전체회의에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왼쪽)과 ARF 의장국인 싱가포르의 조지 여 외교장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 싱가포르=연합뉴스
무슨 얘기 나누기에…
24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15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전체회의에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왼쪽)과 ARF 의장국인 싱가포르의 조지 여 외교장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 싱가포르=연합뉴스
■ 외교부가 밝힌 ‘싱가포르 진실’ 전말

남북 시정요구-항의에 성명내용 반전 거듭

‘北이 먼저 삭제요구’ 안 밝힌 이유 설명 안돼

“남북 상황 모르는 싱가포르 과욕탓” 분석도

《2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의 의장성명이 수정된 경위에 의혹이 잇따르자 외교통상부가 27일 협의 과정을 전격 공개했다. 이용준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이날 ARF 성명서가 폐막 후 수정된 데는 북한의 항의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교도통신 26일자 보도에 대해 “한-싱가포르 외교관계를 고려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한 당국자는 “북한의 강력한 항의가 싱가포르 정부의 ‘성명 수정’ 결심을 이끈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북한의 극력 반발, 한국은 ‘망외의 소득’

북한 박의춘 외무상은 24일 ARF 폐막 직후 강력히 반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이라면 박왕자 씨 피살 사건인 금강산 문제가 국제회의에서 공론화되는 데 따른 부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 역시 예상치 못하게 ‘10·4 정신’이라는 표현이 성명서에 포함된 점에 곤혹스러워했다.

남북한은 모두 성명서가 공개된 24일 밤 싱가포르 외교부 당국자를 수소문했지만 전화 접촉조차 불가능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용준 차관보가 25일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과 오찬을 함께할 때도 외교관례상 ‘사후 수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북한의 강력한 항의를 수용해 이례적으로 ‘두 문항 삭제를 통한 수정본 발표’라는 카드를 던졌다.

이 차관보는 귀국 비행기에 있던 유명환 장관 대신 서울의 권종락 제1차관의 승인을 얻어 삭제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국자는 “청와대 재가 여부는 확인 못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외교부는 25일 언론에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이의 제기(만)으로 수정됐다”고 설명해 ‘절반의 진실’만을 공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예상 빗나간 회의 진행

싱가포르 정부는 ARF 개최 하루 전인 23일 회의 결과를 예측해 만든 성명서 초안을 회람시켰다. 초안에는 “장관들은 남북정상회담과 10·4 선언을 환영했다(welcome)”는 문구가 포함된 반면 금강산 피살 사건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싱가포르 외교부 실무자는 한국 측에 “(한국이 원하는) 금강산 문제는 장관회의에서 언급되면 성명서에 넣겠다”고 구두 약속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는 24일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장관들이 10·4 정상회담에 환영했다’는 문구의 수정을 요구했다. 실제 장관 가운데 환영 발언을 한 이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의 요구가 수용돼 “장관들이 인식했다(note)”는 표현으로 수위가 낮아졌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정작 회의가 종료된 뒤에는 ‘최종 초안’을 공개하지 않았다. 통상 의장국은 국가별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이의 제기 기회를 줘 왔다. 외교부 당국자는 27일 “국경분쟁을 겪는 태국-캄보디아도 문구에 신경전을 벌였다”며 “싱가포르 조지 여 외교장관으로선 이해관계 조정이 쉽지 않은 만큼 직권으로 밀어붙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24일 오후 8시 반에 공개된 최종안은 한국 정부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금강산 문제에서 한국이 기대하던 ‘남북대화를 통한 해결’이 빠졌던 것이다. 반면 보수층이 부담스러워하는 ‘10·4 정신’을 기초로 한 남북대화 재개 표현이 포함됐다.


▲영상 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경모 기자

○ 조지 여 외교장관의 의욕과 실수

이번 ARF 회담은 개방형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의 조지 여 장관이 주도했다. 그러나 이번 성명서 수정 해프닝을 통해 여 장관이 10여 개국의 이해관계가 뒤얽힌 ARF 다자외교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외교적 미숙함을 드러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전직 외교당국자는 26일 “폐막 하루 뒤 성명서를 수정한 게 이례적이다. 그런 만큼 싱가포르는 ‘지나간 일’이라며 수정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수정했다. 실수를 자인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배경에는 조지 여 장관의 개인적 의욕, 싱가포르의 한반도 정보 부족 등이 얽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정치인 출신인 여 장관은 5월 닷새 동안 평양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그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이 체결한 우호협력조약에 북한이 서명 가입할 것을 제안했고 ‘긍정적 답변’을 이끌어 냈다. 그 서명식은 ARF 성명서가 발표되기 직전에 열렸다.

24일 공개된 ‘수정 전 성명서’에는 북한의 기대가 더 반영됐었다. 고려대 A 교수는 “여 장관이 자신의 브랜드가 붙어 있는 ‘북한의 우호협력조약 가입’에 동의해 준 북한의 요구를 조금 더 경청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한국 외교부가 과거 정권의 상징물(10·4 정상회담 선언)을 현 정부가 떠안도록 하는 내용의 성명서 문구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싱가포르에 충분한 ‘사전 교육’을 했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영상 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경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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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경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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