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화해와 통일이 성사된다는 환상과 거기에 노벨 평화상까지 안겨다 준 ‘햇볕정책’으로 2000년 8월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 순차 상봉은 지난해 10월까지 한 차례에 100가족씩 모두 열여섯 차례 성사됐다. 그나마도 처음 두세 번은 서울과 평양을 서로 오가며 만났으나 뒤에 가선 대부분의 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 관광지에서 이뤄졌다.
바로 이 금강산 해변의 백사장에서 남쪽의 여성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남북한 당국의 대처 상황을 보면 남은 날이 많지 않은 이산가족의 실낱같은 상봉의 꿈은 더욱 멀어져 가는 것만 같다.
금강산 관광 재개에만 관심
마음이 더욱 답답한 것은 여성 관광객 총격 살해사건 이후 언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재개될지 궁금해하면서도 언제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될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정치권이며 공론권의 무관심이다.
듣기에도 민망한 점은 이번 총격 살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올 8, 9월쯤에는 금강산 관광객의 누적 숫자가 ‘대망의 200만 명을 돌파’했을 것이라 기대되었으나 그 앞날이 이젠 불투명해졌다고 아쉬워하는 모습이다.
1998년 11월 특별 여객선이 뱃길로 속초항을 출항하면서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2005년 6월까지 관광객 수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07년 6월에는 내금강 관광이 개방돼 코스가 다양해지고 거기에 정상회담 개최로 남북관계가 호전되면서 관광객 수는 150만 명을 넘어섰다. 게다가 올봄부터 승용차 관광이 가능해지면서 금년 5월 말까지 누적 관광객 수는 188만 명에 이르렀다니 그야말로 200만 명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내게는 이 숫자가 자랑스럽지가 않고 왠지 미안하기만 하고 민망스럽기만 하다. 더욱이 이 숫자를 남쪽의 이산가족 중에서 그동안 북의 혈육을 만나기 위해 평양이나 금강산을 찾아간 숫자와 비교해 볼 때.
따지고 보면 거동을 못하는 노약자와 젖먹이까지를 포함한 남한 총인구의 4%가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을 구경한 셈이다. 그런데도 혈육과 상봉하고 싶다고 신고한 이산가족은 1 만여 명밖에 휴전선 이북의 가족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수십만 t의 쌀과 비료를 갖다 주고 거액의 외화를 관광대금 명목으로 북쪽에 지불하면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햇볕정책’의 성과가 이렇다면 그건 좀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서독의 동방정책으로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뚫릴 때까지 270만 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독을, 520만 명 이상의 서독 주민이 동독을 찾아가 한 해에 도합 800만 명의 이산가족과 친지가 서로 만났다. 헤어진 사람을, 헤어진 겨레를 만난 것이다.
독일인이 성채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포츠담의 상수시 별궁을 보러 가기 위해, 또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덴의 젬퍼 오페라를 보러 가기 위해 분단시대의 서독 주민이 동독을 찾아갔다는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니다. 그들은 갈라진 국토의 명승지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갈라진 동족의 혈육을 만나러 수백만 명이 분단의 경계선을 넘어갔던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뒷전이라니
국토가 갈라진 것만이 ‘분단시대’인가. 금강산 구경을, 백두산 등반을 마음대로 못해서 ‘분단시대’인가. 금강산을, 백두산을 찾아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인가? 차가운 돌산만을 구경하고 사람끼리는 말도 건네 보지 못하면서 잘못 가까이 가면 총격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면 듣기에도 살가운 ‘우리 민족끼리’란 구호는 어디다 걸어 놓겠다는 말인가. 금강산 백두산을 보기 위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 부르는가? 북한은 정녕 우리의 관광지란 말인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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