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파동 - 院구성 격랑 뚫고 MB號 다시 앞으로…

  • 입력 2008년 8월 23일 03시 12분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광복 63주년 및 정부수립 60주년 경축식이 끝난 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국민이 힘을 합치면 머지않아 미래 강국이 될 수 있다”며 연설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광복 63주년 및 정부수립 60주년 경축식이 끝난 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국민이 힘을 합치면 머지않아 미래 강국이 될 수 있다”며 연설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명박 정부가 25일로 출범 6개월을 맞는다. 좌파정권 10년 만에 보수정권 시대를 연 이명박 정부는 촛불정국으로 상징되는 극심한 정치 사회적 갈등을 겪으며 한때 국정운영 지지율이 10% 중후반대까지 떨어지는 등 유례없는 정권 초기 혼란상을 보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권교체의 과도기를 넘기고 본격적으로 국정 과제를 추진 중인 이명박 정부 6개월을 점검해본다.》

■정치·사회

‘쇠고기’ 폭력시위-국회 공전 홍역

4·9총선은 여당 내 주류세력 교체와 국회 차원의 정권 교체를 완성시켰다. 한나라당에서는 친이(親李·친이명박) 세력이 주류로 부상했고, 공천에 탈락한 친박(親朴·친박근혜) 세력은 탈당해 친박연대나 무소속으로 총선에 나섰다가 진통 끝에 7월에야 복당 조치됐다.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두언 의원이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 갈등을 빚으면서 인사 전횡 논란도 뜨거웠다.

5월 초부터 본격화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반대 촛불시위는 현 정부에 비판적인 정치세력들이 가세하면서 반정부 투쟁과 폭력 사태로 변질됐다.

이 대통령은 촛불시위가 장기화되자 5월 22일 대국민 사과 담화문을 발표했고 결국 6월 20일 정국쇄신 차원에서 류우익 당시 대통령실장과 수석비서관 전원(수석비서관급인 이동관 대변인은 유임)을 교체했다.

이 대통령은 폭력·과격시위에 대해서는 법질서 수호 차원에서 원칙적 대응을 천명했으나, 연일 서울 세종로 사거리가 시위대에 점거당하고 동아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사는 시위대에 의해 기물이 파손되고 사기(社旗)가 내려지는 등 직접적 테러를 당했다. 촛불시위의 폭력성을 비판한 언론사에 광고를 제공하는 기업들을 협박한 사람들이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18대 국회는 5월 30일 임기가 시작됐으나 한미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야당은 원 구성을 거부했고, 국회는 82일의 공전(空轉) 끝에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에 합의하는 것으로 가까스로 원 구성에 합의했다.



■경제

고유가 쇼크로 ‘747’ 사실상 폐기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 ‘747’(연평균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비전과 공공부문 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민간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내걸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 위기와 세계적인 고유가 현상으로 ‘747’ 비전은 사실상 폐기됐다.

고유가 등 각종 가격상승 요인이 우려되자 이 대통령은 서민생활과 직결되는 품목의 가격을 집중관리토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52개 품목을 관리대상으로 지정해 이른바 ‘MB 물가지수’ 관리에 들어갔으나 효과는 없었다. 통계청이 1일 발표한 소비자 물가 동향에 따르면 7월 소비자 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9% 올라 9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여기에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상수지 적자를 방지하기 위해 ‘고환율 정책’을 주도했으나, 환율은 계속 오르고 물가도 고공 행진을 계속했다. 일각에서는 성장 없이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경기침체는 대외적 환경에 기인한 측면이 컸으나, 공공부문 개혁은 쇠고기 파동이라는 대내적 요인으로 인해 당초 예상보다 그 속도와 폭에 크게 제동이 걸렸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민영화 괴담’이 확산되자 여권 내에서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속도 조절론이 힘을 얻었다. 정부는 현대건설 등 공적자금 투입 기업까지 포함해 41개 공공기관 및 기업을 민영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최근 고유가 행진이 주춤해지는 등 대외 여건이 개선될 조짐을 보임에 따라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인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가동할 계획이다. 특히 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밝힌 ‘저탄소 녹색 성장’으로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한편 정기국회에서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복안을 세웠다.

■문화·언론·교육

영어몰입 교육 비판에 속도 조절

여론시장에서 담론을 생산하는 기관 단체의 장(長) 자리를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된 인사들이 장악한 채 이명박 정부의 인적 교체 시도에 저항하면서 신구 정권의 갈등이 증폭됐다.

KBS 정연주 사장의 거취가 최대 쟁점이 됐다. 감사원은 방만경영의 책임을 물어 정 사장에 대해 해임제청할 것을 KBS 이사회에 요구했고, 이 대통령은 KBS 이사회의 제청에 따라 정 사장을 해임했다.

쇠고기 파동의 도화선이 된 MBC ‘PD수첩’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과장 왜곡한 사실이 드러나 방송통신위원회 결정에 따라 사과방송을 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영어몰입교육’ 발표로 여론의 비판을 받은 뒤 각종 교육정책은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방과후 학교 규제를 폐지하고 수준별 수업을 실시하도록 하는 학교자율화 조치가 시행됐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외교·안보

한-미 동맹 회복… 남-북은 급랭

이명박 정부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4강(强)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안보 위협을 없애면서 공생 공영할 수 있는 실용외교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를 위해 이 대통령은 우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와 6개월 동안 2, 3차례씩 회담하는 정상외교를 전개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 소원했던 한미관계는 급속히 회복됐다는 평가다. 그러나 중국은 한미관계 강화를 경계하고 있고,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또다시 주장하고 나서 한반도 주변 강국과의 관계 조율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이 대통령은 4월 13일 취임 후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 ‘조정기간’을 거치고 있다고 표현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 따라 지난 10년 동안 형성된 남북관계의 틀이 새롭게 정립되는 기간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대통령을 직접 비난하는 등 대남(對南) 비방과 무력시위를 강화하고 지난달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을 일으키면서 남북관계는 ‘조정’이 아닌 ‘중단’을 향해 치닫는 양상이다.

23일 현재 남북 당국 간 관계는 사실상 정지 상태다. 3월 27일 개성공단 내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경협사무소)에서 남한 당국자 11명이 추방된 이후 판문점 내 양측 연락관의 간헐적이고 기계적인 접촉만 유지되고 있다.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이후 민간 관계도 경색되고 있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지에서 필수인원 200여 명을 제외한 남측 인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북한이 한국인 신변안전 보장 등에 협조하지 않자 한국 정부는 민간의 대규모 방북을 만류하고 있다.

먼저 남북관계의 판을 깬 것은 북한이다. 북한은 남한의 새 정부가 진용을 갖추기 전인 3월 말부터 대남 적대정책을 시작했다. 이 대통령이 전면적인 대북 대화를 제의하는 날 아침엔 금강산에서 50대 여성 관광객을 사살했다.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은 북-미관계가 급진전될 것으로 기대하고 일부러 남북관계의 속도를 늦추는 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한미동맹에 따라 한국을 거치지 않고는 미국과 통할 수 없다는 현실을 간과한 전략적 오판”이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 마지막 해에 국민적 동의 없이 비정상적인 대북 ‘퍼주기’ 약속을 남발해 북한의 기대심리를 키우고 현 정부에 부담을 주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독일에서도 1982년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교체됐지만 전임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합리적이고 신중한 ‘동방정책’을 추진한 결과 후임 헬무트 콜 총리도 정책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역대 정권 6개월과 비교

김영삼 금융실명제-재산공개 등 개혁 속전속결

김대중 외환위기 해결 내세워 국민단합 유도

노무현 인터넷-방송 지지 업고 이념정책 강행

이 대통령은 보수는 물론 중도층까지 포괄하는 531만 표의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지만 고유가와 원자재 가격 급등을 비롯한 경제환경 악화, 대선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 등으로 인해 집권 초기 ‘허니문 기간’을 갖지 못했다.

1998년 정권 교체로 출범했던 김대중 정부도 집권 초 인적 물적 토대의 취약이라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역으로 국정 운영에 필요한 국민적 단합과 협조라는 긍정적 환경을 조성해 준 측면이 있다.

5년 전 노무현 정부는 ‘영남 출신 대통령에 호남 기반 여당’, 수도 이전 공약을 고리로 한 충청권의 지지, 노사모와 386, 좌파세력, 인터넷과 방송의 절대적 지원을 바탕으로 코드와 이념형 정책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첫 문민정부임을 내세워 범여권을 장악하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등 개혁 과제들을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소통령 김현철 씨’의 인사 및 국정 개입 논란으로, 김대중 정부는 호남 편중 인사와 햇볕정책의 무리한 추진으로 인한 남남갈등으로, 노무현 정부는 편가르기식 정치와 반기업 정서, 포퓰리즘으로 이후 국정 운영의 부담 요인을 자초했다는 평가다.

이명박 정부도 임기 초 국정 위기를 초래했던 ‘소통 부족’과 인선 문제, 그리고 정책 혼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향후 진로가 달려 있다는 것이 여권의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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