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까지 누적적자 77억달러
고유가에 반도체-IT부진 겹쳐
계속해서 늘어나는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위기설’을 키운 또 하나의 악재(惡材)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적자를 낸 경상수지는 6월 18억2440만 달러의 반짝 흑자를 보였지만 7월 한 달 만에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1∼7월 누적 경상수지 적자는 77억9770만 달러로 불어났다.
경상수지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고유가로 인한 상품수지 흑자 규모의 감소. 세계 경제의 침체로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분야 수출이 부진한 것도 한몫했다.
기획재정부는 10, 11월에 상품수지 흑자가 늘고 서비스 적자폭이 감소하면 연간 경상수지는 100억 달러 안팎의 적자를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연간 경상수지 적자를 내는 셈이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심각한 상황으로 보긴 이르다고 진단했다. 외환위기 전에는 1994∼1997년 4년 연속 적자로 누적적자가 440억 달러나 됐다. 적자 기조가 굳어진다면 심각한 문제지만 올해는 국제 경제의 심각한 위축 상황에서 발생하는 첫 번째 적자다.
사전조율 없이 정책 발표했다 철회… 시장불신 자초
쇠고기시위-여야대립 등 정치-사회 불안도 문제키워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와 한국은행의 잇따른 해명에도 ‘9월 위기설’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원인 중 하나로 정부와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본격화된 세계적 경제위기는 이 대통령 취임 전부터 그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출범 6개월이 지나도록 실효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이 대통령이 정작 위기상황에서 ‘경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경제 리더십’ 절실한 때
좌파정권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이 대통령은 “경제는 반드시 살리겠다”고 거듭 다짐했지만, 정부가 내놓은 각종 정책수단은 시장에서 이른바 ‘약발’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 점이 9월 위기설의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정부는 출범 초부터 시장과 학계 일각의 반대에도 고환율 정책 드라이브를 폈다. ‘747’(연간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비전 달성을 위해 계속 성장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원-달러 환율이 좀 더 오르더라도 경상수지 적자를 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고환율 정책이 고유가 행진 등과 맞물려 물가상승을 초래하자,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 등을 통해 정책 우선순위를 물가관리로 바꿨고, 이 과정에서 시장은 정부의 경제정책 전반을 불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강석훈(경제학) 성신여대 교수는 “중대한 거시경제 정책을 호떡 뒤집듯 하다 보니 시장이 정부 정책에서 무게를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위기설도 고유가 행진이 주춤하자 정부가 환율 관리를 느슨하게 할 수도 있다는 시장의 관측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도 6월 11일 기자들과 만나 “외채가 상당히 늘었고 국제수지도 단기간에 흑자로 전환되기 힘들다.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지만, 정부 정책으로 반영되지 못했다. 금융 불안정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되는 임 의장의 발언에 대해 이 대통령은 “국가 신뢰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며 일축했다.
일부 정책은 한나라당이 정부와 면밀한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내놓았다가 거둬들여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한나라당은 최근 일부 생필품에 대한 부가가치세 환급 방안을 내놓았다가 철회했고, 대기업 법인세 인하 시기도 운송업 구조조정 등을 위한 재원 마련을 명분으로 당초 약속보다 1년 늦추기로 해 논란을 일으켰다.
○ 건재한 경제라인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현 정부 경제라인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대해서도 비판이 없지 않다. 특히 최중경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의 ‘대리경질’ 파문으로 시장에 대한 장악력이 급속히 약화된 강만수 재정부 장관에 대한 말이 많다.
강 장관은 3월 25일 한 강연에서는 “대통령이 성장보다 물가가 우선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 한동안 시장에 혼선을 유발한 적도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원-달러 환율이 오른다고 환투기 세력을 겨냥해 ‘어디 맛 좀 봐라’는 식으로 달러를 쏟아 붓는 것은 10년 전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시장 일각에서는 잇따른 정책 실패에도 계속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강 장관을 빗대 ‘만수무강’이라는 말도 나온다.
○ 위기 경계하다 위기 부르는 대통령?
이 대통령도 취임 초부터 종종 ‘경제가 위기’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시장의 혼선과 오판을 야기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3월 17일 지식경제부 업무보고에서 “이런 위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세계 위기가 시작된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4월 28일 대기업 회장단과의 회동에서 그는 현 시점을 ‘불경기’로 규정했다. 2일 국무회의에서도 현 시점을 ‘비상시기’로 봤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경제위기 상황인 만큼 국민적 단합을 강조해 온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국정 최고책임자는 시장에 불필요한 오해를 줄 수 있는 발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0년 만의 보수정권 출범 이후 6개월 동안 촛불시위, 노사갈등, 여야대립 등 극심했던 정치사회적 불안정이 한국 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들의 회의를 증대시켰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9월 위기설은 경제문제를 넘어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던 이명박 정부의 정치 사회적 혼란상과도 무관치 않다”고 진단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한나라 “위기가 기회… 적극 투자를”
재 계 “규제개혁-제도정비가 먼저”
與-경제 5단체장 ‘경제 해법찾기’ 간담회▼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인사말에서 “18대 국회에서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상호출자금지 완화, 법인세 인하 등 세제 지원,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관련법 개정 등을 신속히 하겠다”며 “불황기야말로 투자의 최적기다. 어렵지만 투자 좀 해 달라”고 말했다.
이에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올해 말까지 600개 기업이 전년 대비 22% 늘어난 100조 원 정도를 투자할 것으로 보인다”며 “서민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이 역할을 할 테니 국회도 기업이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규제개혁과 제도 선진화에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법인세, 상속세 등 관련 세제를 세계 선진국 수준과 비슷하게 해주길 바란다”며 “기업의 업무용 토지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완화, 상속세 할증과세 폐지 등의 추가 세제개편이 필요하며 미분양으로 고통 받는 지방 건설업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노조 전임자 문제, 복수 노조 문제 등 노사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외국 기업들의 투자 유인책을 만들 수 없다”(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대일 무역 적자폭을 줄이기 위해 부품소재 산업 육성 대책이 필요하다. 정기국회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꼭 처리해 달라”(유창무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어감이 나쁜 접대비 용어를 대외활동비로 바꾸고 외부 회계감사 의무화 기준도 낮춰 달라”(장지종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등의 의견도 제시됐다.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한나라당은 이번 국회를 ‘경제국회’로 끌고 갈 예정이며 규제개혁을 의지를 갖고 추진하겠다”고 말하고 “기업들이 공기업과 협조해 해외의 신도시, 발전소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적극 진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