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녕]계파·계보

  • 입력 2008년 9월 19일 20시 06분


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회동하면서 “여당에는 계보나 계파가 없다. 여당은 하나다”라고 말했다. 연립정권이 아니므로 여당이 한나라당 하나뿐인 것은 맞다. 하지만 계보나 계파가 없다는 말을 수긍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멀리 갈 것 없이 당내에서 친박(親朴·친박근혜)을 공공연하게 내세워온 사람들은 계보나 계파와 무관한가. 이 대통령이 한 말을 박근혜 전 대표가 공식적으로 분명하게 했다면 설득력이 다소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 대통령의 의중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나라당에서 계보나 계파 얘기가 안 나오도록 해 달라. 한나라당이 계파를 떠나 하나로 똘똘 뭉쳐 나를 도와 달라”고 주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홍준표 원내대표의 거취를 둘러싸고 벌어진 당내 계파 간의 갈등, 박희태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리더십 논란에 대해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언급하기가 뭣해서 당위론만 밝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홍 원내대표를 유임시키되, 그 대신 박 대표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은 “당 대표가 지원하는 것이 (홍 원내대표에게) 최고의 세(勢)”라거나 “당 대표가 원(국회) 내외를 아우르는 중심이 돼야 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희망한다고 계파가 갑자기 사라질까. 한나라당 내 계파는 크게 친이(親李·친이명박), 친박으로 나뉘고 친이는 다시 몇 가닥으로 분화돼 있다. 친이상득, 친이재오, 친이방호계가 있고 친이 직계라는 것도 있다. 누구 덕에 의원 배지를 달았느냐가 분류의 주된 잣대다. 같은 친이라도 사안에 따라 목소리가 각양각색이다. 홍 원내대표의 퇴진 요구는 친이재오계가 주도했다고 한다. 요즘엔 잠재적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계파 형성의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정치인에게 계보나 계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과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씨는 그 목줄을 거머쥐고 지역할거주의의 단맛을 빨면서 ‘소왕국’ 왕 노릇을 했다. 돈과 공천권이 힘의 원천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런 구태정치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줄을 잘 서야 살아남는다는 것이 지금 정치에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이런 정치를 바꿔낼 수 있을까.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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