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모스크바에선 한국에서 온 VIP들이 이용하는 경호차량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2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자원개발과 관련해 기업 임원이나 자원개발 전문가들의 방문이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치안이 여전히 위험한 현지 사정상 방탄차 이용은 필수적이다.
한-러 정상회담은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처음으로 양국 간에 ‘탈(脫)이념 실질협력시대’를 열 것이라는 게 모스크바 외교가의 전망이다. 이대통령은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도 만난다.
○ 기업임원-전문가 모스크바 방문 급증
지식경제부와 주러 한국대사관은 올해 7월 한국석유공사와 SK 등이 참여했다가 면허가 정지됐던 서(西)캄차카 유전개발 사업을 재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올리기 위해 외국 공관을 포함한 러시아 인맥을 풀가동한 상태다.
러시아는 에너지 개발과 관련해 2003년부터 외국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꿨다. 최근 엑손모빌, BP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도 규제의 철퇴를 맞고 개발권과 지분을 뺏겼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발굴되지 않은 유전과 광물이 개발된 것보다 더 많다. 한국이 자원외교 역량을 발휘할 틈새가 얼마든지 남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동시베리아와 사할린은 러시아의 자원 보고(寶庫)로 떠올랐다. 러시아는 2020년까지 총 7700억 달러를 이 지역에 풀어 에너지 수출을 늘리겠다는 계산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곳에서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서 수출 통로를 저울질하고 있다. 실용외교노선을 표방한 한국은 러시아의 경쟁국이 된 중국이나 러시아와 영토분쟁이 해결되지 않은 일본에 비해 유리하다.
러시아 에너지 전문가 알렉세이 슈마코프 씨는 “이 대통령이 10년 앞을 내다보고 치밀한 전략을 짠 뒤 투자를 시작하면 자원 수입 다변화와 함께 동반 성장의 축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 실질협력 여건을 갖춘 러시아
러시아가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오일 머니를 축적한 것도 실질 협력에 대한 기대를 가장 높이는 대목.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러시아는 돈 가뭄에 시달렸다. 따라서 실질적인 협력으로 진전되기가 어려웠다.
러시아는 당시 북한과 우호 관계를 청산하는 대가로 한국의 차관 제공을 요구하는 등 당시 정보력에 어두웠던 한국의 처지를 이용했다. 그 결과 양국 정상회담은 화려한 말잔치로 끝나거나 양국 지도자의 이념과 정략의 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7000억 달러에 이르는 오일 머니를 축적한 뒤부터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급속히 바뀌었다. 요즘 나오는 러시아의 극동 개발 계획에는 러시아 연방 예산 지원 규모가 꼭 따라 붙는다. 예전처럼 자기 자본도 없이 무조건 단기 외자를 끌어들이는 정책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 양국 정상도 실질 협력 모드
이번 회담에서 만나는 이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양국 관계를 좌우했던 이념과 정략의 틀을 넘어설 조건을 갖췄다.
이 대통령은 1980년대 말 소련이 붕괴되기 전부터 자본주의의 첨병인 기업인들을 이끌고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했다. 러시아 정치인들은 이 대통령을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러시아 실정을 가장 잘 아는 지도자로 꼽는다.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역대 러시아 대통령 중 소련 시절 관직에 오르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소련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의 여파로 머리를 기르고 서양 록 음악에 빠져 있던 젊은이였다.
상당수 현지 전문가는 한반도에 대한 그의 행보도 포스트 소비에트 세대답게 탈이념 모드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한다.
두 정상은 또 취임 초부터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표방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스크바 외교가에서는 벌써부터 “두 정상이 거창한 선언에 집착하기보다는 석유 식량 광산물 우주 등 실질적인 경제 협력에 몰두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남-자본, 북-노동력, 러-자원
‘3각협력’ 이번엔 성사될까▼
“러시아 극동에서 북한의 노동력과 한국의 자본을 합친 경제협력사업을 적극 모색하겠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 2월 밝혔던 내용이다.
이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선 남북한과 러시아의 삼각협력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북한을 통해 러시아 극동의 천연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러시아 측이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즉석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각협력 방식은 ‘논의’는 많았지만 구체적인 결실로 연결되진 못했다.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 사업도 2001년부터 ‘추진 의사’는 몇 차례 나왔지만 여태껏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한국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투자를 미뤘고, 북한은 군부의 반대로, 러시아는 재원 부족으로 사업을 미뤄왔다.
러시아 가스관의 북한 통과 문제도 북한의 반대로 원점에서 재검토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일단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만나 구체적인 사업 방안과 투자 일정을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한국이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내놓고 있고, 러시아도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TKR와 TSR 연결 사업과 북한 노동력 활용 사업이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도 있을 것으로 모스크바 외교가는 점치고 있다.
그런데 북한 통과 철도 및 가스관 사업은 북한 최고지도부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북한 측이 최종 동의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더구나 최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까지 제기되면서 방정식은 더욱 복잡해졌다. 한러 양국 정상이 복잡한 방정식을 어떻게 풀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