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11일 북한의 핵시설 검증 방식에 합의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것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과 대미 정책에 복잡한 숙제를 던졌다.
정부는 출범 초부터 좌파정권 10년 동안 훼손돼 온 한미관계 복원과 ‘완전하고 정확한’ 북핵 검증을 정책기조로 내세웠으나 북-미가 현실적으로 이를 기대하기 어려운 순차적 검증 방식에 합의하는 바람에 애매한 처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6자회담의 한 당사국인 일본이 북-미 합의안에 반발하고 있고 이번 합의를 주도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임기 종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 차기 정부의 북핵 정책이 한국 정부의 북핵 정책과 일치할지도 확실치 않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은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만 대화를 하려 한다. 정부의 북핵 정책이 중차대한 도전에 직면한 이유다.
○ 제네바 합의 수준으로의 복귀?
미 국무부가 공개한 북-미 핵검증 합의문에 따르면 검증대상은 북한이 이미 신고한 영변 핵시설로 국한돼 있다. 미신고 시설에 대해서는 ‘상호 동의’를 전제로 해 사실상 배제됐다. 핵문제의 핵심 사안인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과 핵무기, 북-시리아의 핵협력 의혹 문제도 빠져 있다.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영변 핵시설의 핵 활동을 불능화해 플루토늄 핵폭탄의 추가 개발을 막는 조치밖엔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 수준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나온다.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 실시를 결정하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핵 1차 위기가 시작됐다. 북-미는 3차에 걸친 협상으로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특별사찰 문제는 시간을 두고 해결하되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장소에 대한 추가 접근을 허용하는 쪽으로 합의를 했었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10월 북한의 UEP 의혹을 제기하며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고 대신 2003년 8월 27일 출범한 북핵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협상을 진행해 왔다. 그런데 ‘북핵 폐기’를 목표로 5년여 동안 지루한 협상을 벌여왔지만 결국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밀려 임기 종료를 앞두고 UEP 문제와 미신고 시설 문제에 대해 큰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반쪽짜리 검증에 합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
지난 5년간의 6자회담의 험난한 과정을 복기해볼 때 이른바 ‘다단계 보상극대화 전략’을 써 온 북한이 핵을 빌미로 대화 중단과 재개를 반복할 소지가 커 핵 폐기 단계까지 가는 것은 산 넘어 산인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 한미 공조의 역설
한미공조를 외교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북-미의 핵검증 방식 합의 및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에 “환영한다”고 밝혔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테러지원국 해제 과정에서 한미 간 긴밀한 협의가 있었고 마지막까지 우리 의사가 반영됐다”며 “한미공조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적지 않은 속앓이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 내에서는 상당한 불만이 제기됐지만 ‘물샐 틈 없는 한미공조’를 입버릇처럼 강조해온 터여서 드러내놓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에 정통한 한 정부 당국자는 “미국은 정권 차원의 외교 성과를 위해 북핵 협상을 끌고 갈 수 있는 만큼 미국의 원칙이 흔들릴 때는 우리가 원칙을 상기시켜주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미국이 좋으면 우리도 좋다’는 식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차기 미 행정부에서 한미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중요하다. 특히 버락 오바마 후보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설 경우 북-미 관계의 진전 속도를 놓고 한미 간에 이견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북-미 관계가 잘 풀릴 경우 역설적으로 한국 정부는 설 자리가 더 좁아질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간 이명박 대통령은 과거처럼 북한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고 남북관계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해왔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 등도 북한의 핵 포기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우고 남북경협은 물론 인도적 지원에도 ‘상생’과 ‘호혜’라는 조건을 달아 왔다.
이런 정책 기조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지적이다.
체제 보장 및 미국과의 수교를 염원하는 북한의 속내를 염두에 두고 대미, 대북 정책의 기조를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차기 미 정부의 구상과 핵폐기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이 드러날 때까지 긴 호흡으로 큰 그림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외교 전문가는 “북한이 미국과만 대화하고 남한을 배제하는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을 계속 시도하는 데 대해 과거 정부처럼 쉽게 지쳐서는 원칙을 지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北 급변사태 시작됐다고 봐야▼
단계별 대응시스템 구축 시급”
정부는 ‘비핵·개방·3000 구상’과 ‘상생·공영’ 대북 정책을 통해 북한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추구해 왔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병상 통치와 그의 유고 가능성으로 북한 내부의 불확실성이 훨씬 커졌다. 북한 급변사태와 붕괴 등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전문가들은 “급변사태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며 정부가 단계별 대응방안을 철저히 마련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경기대 남주홍 교수는 “북한의 급변은 정책과 전략의 격변, 리더십의 격변, 제도와 체제의 격변이라는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최근 김 위원장의 와병설과 북한의 이상 행보는 두 단계가 이미 시작됐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예상되는 시나리오에 맞춘 위기관리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우선 김 위원장의 병상통치가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김 위원장의 정책결정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일부 측근이 김 위원장을 대신해 정책결정을 하는 것인지, 군부의 동향은 어떤지 등 북한 내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한국 정보당국의 정보수집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등 한반도 주변 당사국들과의 긴밀한 정보 공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기본적인 과제다.
김 위원장 유고 시 북한 체제 및 국가가 유지되는 경우와 체제 및 국가가 붕괴되는 경우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쿠데타 및 내전 가능성, 무더기 난민 사태, 대량살상무기 및 핵 관련 기술 및 재료 유출 가능성, 중국군의 진주 가능성 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를 정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북한 난민 20만 명을 강원도 지역에 수용한다는 ‘충무3300’ 및 북한에 자유화 행정본부를 설치하는 내용의 ‘충무 9000’ 계획 등 과거 정부가 마련한 급변사태 대비 계획을 손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연합사령부의 ‘작전계획5029’를 구체화하는 논의도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만큼 속히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다.
모든 경우에 대비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컨트롤타워를 만들자는 정치권과 일부 전문가의 의견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이명박 정부 식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