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대란 - 한반도 급변정세 - 이념대립 등 코앞에 위기 산적
10년 전엔 위기극복 공감대 형성… 올해는 정쟁의 늪서 허우적
“경제 살려야” 말만 외치지 말고 당리당략 벗어나 행동 보여야
《세계적 금융위기와 북핵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주변정세의 급변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선 국가적 어젠다의 우선순위와 방향을 신중하게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하지만 정치권은 대립과 투쟁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전투구에 골몰해 있어 국가적 위기 극복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국가의 주요 현안에 관해선 여야가 ‘경쟁 속의 협력, 협력 속의 경쟁’을 표방하며 초당적 협력을 모색하는 새로운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먼저 나라가 있고 난 뒤 여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경제 살리기, 목청이 아니라 행동을
최근 경제상황은 주가 폭락과 외국인 매도세 급증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은 말로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도 정작 이를 위한 행동에서는 당리당략을 앞세워 오히려 정책의 집행을 가로막는 양상이다.
정부는 최근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에서 합의한 금융안정에 공조하기 위해 수출입은행을 통해 수출 중소기업과 은행에 200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고 외환 스와프시장에 100억 달러 이상을 공급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의 지급보증에 대한 국회의 동의안 처리는 여야 힘겨루기 속에 지체될 조짐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5일 경제 살리기를 위한 초당적 협력을 선언했음에도 구체적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 좌파 정권 10년의 유산을 청산하려는 여당의 조급증과 10년 만에 야당으로 밀려난 민주당의 박탈감이 맞물려 상대를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6·25전쟁 이후 경제위기와 안보위기가 동시에 온 것은 처음”이라며 “나라가 있고 여야가 있으며, 경제위기를 맞은 지금은 나라부터 살려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여야 역할 반성과 역지사지(易地思之) 절실
1997년 외환위기는 세계경제 여건이 좋은 상태에서 한국의 외화유동성 부족으로 발생했다. 반면 현재는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실물 부문의 위기를 동반한 채 밀려오고 있는 형국이어서 사태의 심각성이 더욱 크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일부 외국 언론은 외환위기 때의 한국을 오늘의 국제 금융위기 속에 오버랩시키며 한국의 위기상황을 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을 토대로 여야가 법 제도 관행의 개선에 공감대를 갖고 고통을 분담했던 것과는 달리 2008년 정치권은 정쟁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올 상반기 내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로 국정에 큰 차질이 빚어졌는데도 정치권은 또다시 경제악화 책임론과 쌀 직불금 등을 둘러싼 끝없는 정쟁으로 국가의 대외신인도를 악화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번번이 정책의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권영준 경희대 국제경영학부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솔직히 국민에게 알리고, ‘위기다’, ‘국민의 힘을 합쳐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국민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도 정쟁을 부를 수 있는 이슈 제기를 지양하고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정치권 역시 정쟁을 한시적으로 중단해야 한다는 게 권 교수의 지적이다.
현진권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위기에 대해 야당은 정치적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흠집 내기로 나가기 십상이다. 위기에 대한 정치권의 공동 대처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그렇다 해도 정치권은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에 여야 공동대처해야
북한과 미국 간 핵 검증 합의와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발표로 북핵 협상이 중대 고비를 넘겼지만 현실적으로 6자회담 합의와 미국의 완전한 핵 폐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여기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까지 겹쳐 국가의 안위와 관련해 비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야가 이념과 정파에 따른 대립을 지양하고 공동의 대응전략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남북문제는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문제로 봐야 한다”면서 “한반도 분단이 모스크바 협정과 얄타협정으로 결정됐듯 철저한 4강 외교로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부겸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민주당)은 “현 위기상황은 대통령 혼자 극복하지 못한다. 정부와 국회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면서 “이 대통령이 여당, 야당에 초당적 기구를 구성하자고 호소할 때”라고 말했다.
최병선 서울대 행정대학원장은 “올해는 10년 만의 정권교체에 4월 총선까지 겹쳐 (여권이) 허니문 기간도 갖지 못한 채 8개월을 보냈다”면서 “야당도 ‘(정부를) 충분히 도와줬다’는 명분을 마련한 뒤 실책을 추궁하면 떳떳하고 힘이 있는, 수준 높은 정치를 구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정치학) 교수는 “유권자들도 이제 다수에 의한 일사천리 식 정책결정보다 다양한 세력 간의 타협과 대화를 통한 정책 결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국가위기부터 해결” 美정치지도자들 앞장
오바마, 구제금융 부결되자 “전체를 위해 통과를”
매케인, 이민법-정치자금법 개혁 민주당과 손잡아▼
미증유의 금융위기를 맞은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이 앞장서 ‘국가위기 해결’을 외치고 있다.
9월 말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법안이 하원에서 전격 부결되자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전면에 나섰다. 야당 후보인 그는 “미국 전체를 위해 이 구조계획을 의회가 통과시켜야 한다”며 구제금융법안에 반대한 자당 및 공화당 의원들을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거액의 세금을 월스트리트 구제에 쓰게 만든 것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실정”이라며 집권당 공격의 빌미로 활용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정치싸움에 지친 국민을 위해 자발적으로 총대를 멘 것은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도 마찬가지다.
매케인 후보는 그동안 당내에선 ‘좌충우돌한다’는 평가를, 외부에서는 ‘위대한 중재자’라는 호칭을 얻었다. 멕시코 불법이민자를 일부 구제하자는 이민법, 정치자금 모금을 제한한 정치자금 개혁법, 정유업계의 반발을 부른 탄소배출제한법 등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모두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입법을 추진한 것이다.
미 정치권과 언론은 “매케인도 상대 정당과 신념을 놓고 싸운다. 하지만 도를 넘어선 싸움에서는 발을 분명히 뺐고, 상대 정당과 손잡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대체로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를 공개 선언해 온 뉴욕타임스가 12일자에서 매케인 후보를 “반대자를 끌어안은 후보(A Candidate Who Embraces Opposites)”라는 제목으로 평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물론 칭찬 일색의 기사는 아니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