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과장하거나 변화에 과잉 대응하지 않는 게 우선 중요하다. 부시나 오바마 모두 북핵 폐기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선 같다. 접근 방법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도 보는 사람의 인식이나 정치적 이유에 따라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경우가 많다. 한 예로 “민주당인 오바마 정부가 북핵에 더 관대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판단이다. 1994년 영변 핵시설에 대해 정밀폭격(surgical strike)을 계획한 것은 빌 클린턴 민주당 정부였다.
‘왕따론’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일각에선 통미봉남(通美封南)을 들먹이며 “앞으로 북-미 사이에서 왕따가 안 되려면 대북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김영삼 정부 시절 핵 위기 해소 과정에서 우리가 소외된 적도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6자회담이란 틀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가 어떤 거래를 하더라도 그 틀 안에서 이뤄지게 돼 있다. 미국이 거래의 대가(代價)로 북에 대규모 지원을 하게 되더라도 6자회담 당사국들의 동의와 참여 없이는 어렵다.
南北관계 호전위해 또 퍼주라고?
그런데도 왜 왕따 걱정을 하는가. 보수 우파가 그런다면 또 모르겠다. 어떻게 언필칭 진보 좌파가 그런 걱정을 하는가. 북-미가 직접 대화를 통해 핵 문제도 풀고 관계도 개선한다면 좌파로서도 바라던 바가 아닌가. 남한 정부가 소외될까 봐 노심초사해서 그런가. 아닐 것이다. 보수 우파에 대한 맹목적(습관적) 반대와 햇볕정책에 대한 병적인 집착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기묘한 비판의 전도(顚倒) 현상을 본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왕따가 안 되려면 남북 관계가 좋아져야 하고, 남북 관계가 좋아지려면 이쪽에서 먼저 머리 숙이고 10·4정상선언의 이행을 포함해 예전처럼 북에 마구 퍼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그렇게 해서라도 북한이 정말로 핵을 포기하고, 남북이 잘 지내게 된다면 뭘 망설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달라는 대로 주고 퍼주어 봤자 핵무기 늘릴 궁리밖에는 안 할 텐데, 지난 10년간 뼈저리게 당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햇볕정책으로 돌아가면 된다니 누가 동의하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심하게 왜곡한 대북정책을 오바마 정부를 등에 업고 또다시 왜곡하려 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해법은 선제적 대응이다. 미국의 새 정부가 대북정책의 밑그림을 내놓을 때까지는 대개 5, 6개월이 걸리므로 이 기간에 미국 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처음부터 밑그림을 함께 그려야 한다. 어떤 그림인가.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1999년 페리 프로세스에 바탕을 둔 밑그림이다. 이 모두가 클린턴 민주당 정부 때 발효 또는 채택된 것으로 한미가 합의하고 양해한 가장 포괄적인 평화 설계도다. 특히 제네바 합의와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북-미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으로 그 원칙은 지금도 살아있다. 따라서 한미 양국은 이를 재확인하고 그 기초 위에서 구체적인 대북정책을 조율해야 한다.
10·4 선언도 단계별로 풀어야
북한이 원하는 10·4정상선언의 이행도 그 틀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합의사항을 북핵 문제와의 연계, 느슨한 연계, 불(不)연계 등으로 몇 단계 세분화한 후 쉬운 것부터 해나가면 된다. 상황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 경제적 타당성과 우리의 부담 능력, 국민적 합의 등을 고려하면서 추진하자는 얘기다. 필요하다면 민관(民官)이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많고 다양한 대북지원 민간단체를 놔두고 왜 정부가 혼자서 끙끙대나.
북한이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잘못된 버릇을 고치려면 몇 배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햇볕정책 10년의 업보도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데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오바마 시대, 핵이 제거되고 평화와 공동 번영이 가능한 한반도를 위해 한미가 선제적 대응(조율)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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