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5일(현지 시간) 이틀 동안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금융정상회의에서 참가국들은 한국의 역할에 주목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이 앞으로 G20에서 핵심적인 실무 역할을 맡게 됐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신흥국이 함께하는 이번 정상회의에 한국이 나란히 참여했다는 점 또한 국제금융시장 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국의 위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G20 합의 이행계획 짜는 재무장관회의 의장국 맡아=한국은 당초 회담 참가 대상이 G13, 또는 G14로 한정될 경우 논의 구조에 끼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국제금융시장에서 역할이 늘어난 신흥국들의 참여 없이는 국제 금융위기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한국은 정식 멤버로 참여할 수 있었다.
한국은 나아가 내년 4월 이전에 개최토록 한 2차 G20 회의를 앞두고 1차 회의의 구체적인 이행 계획(액션플랜)을 작성할 ‘트로이카’ 국가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 G20 정상회의를 준비하는 G20 재무장관회의의 올해 의장국인 브라질과 내년 의장국인 영국, 2010년 의장국인 한국이 G20 정상회의의 사무국 역할을 하는 공동의 ‘지도국’ 임무를 부여받은 것.
비록 순번제이기는 하지만 G20 합의 이행을 위한 구체적 절차와 시간 계획을 마련하는 책임을 맡게 돼 향후 국제금융체제 개편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조정자 역할 의문과 비용 지불 우려도=그러나 의장국이라고 해서 자신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외환위기 극복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이 신흥국을 대표하고 선진국과 신흥국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조정자(mediator)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안팎의 우려 또한 없지 않다.
당장 신흥국 가운데 경제 규모와 성장 속도 면에서 주목 받고 있는 중국과 인도 등의 견제가 예상된다. 또한 국제시장에서의 역할 강화는 그만큼의 ‘비용’을 수반해야 하는 위치로 바뀐다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향후 금융안정화포럼(FSF) 회원국 확대 때 한국이 포함될 가능성과 관련해 “앞으로 우리가 G20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 FSF 회원국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여기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G20 의장국이라는 지위가 바로 금융 선진국 진입을 보장하는 티켓은 아님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언론 설명회=이 대통령은 이날 미국 현지에서 이례적으로 회의 결과를 직접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면서 “한국이 1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중대 과제 속에서 국제무대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그는 “신흥 국가들의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권이 높아졌으며 위상도 높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날 G20 회의 선도연설에서 국제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MB의 4대 구상, 7대 제의’를 밝혔다. 이 가운데 특히 보호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무역 투자와 관련한 새로운 장벽을 만들지 않는다는 이른바 동결(standstill) 선언을 채택할 것을 공식 제의한 대목은 실제 공동선언문에서 ‘개방된 세계경제를 위한 공약’으로 반영됐다.
그러나 정부 안팎에서는 G20에서 한국의 역할 부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대한 경계론도 나온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조기 가입해놓고 나중에 큰 비용을 치르면서 외환위기를 맞았다는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한승수 국무총리는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경제상황점검회의에서 “2차 금융정상회의에서 한국이 신흥국의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가 협의해 구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의제선정-선언초안 작업 70~80% 맡아▼
■ 의장국단 역할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회원국은 지리적 근접성 등을 기준으로 총 5개 그룹으로 나뉘며, 각 그룹은 돌아가면서 1년 임기의 의장국을 배출한다. 한국은 동아시아 그룹의 대표로 올해 8월 말 2010년 의장국으로 결정됐다. G20 회의는 2008, 2009년은 정상회담으로 열린다.
의장국은 의장을 맡기 전후 각 1년 의장국에 조언한다. 의장국과 자문단 역할을 하는 전·후임 의장국 등 3개국을 묶어 ‘의장국단(Management Troika)’이라 부른다.
전·후임 의장국은 각종 회의에서 의장국을 보좌하며 공동의장 역할을 맡는다. 한국은 2009∼2011년 의장국단으로 활동한다.
의장국은 임기 동안 G20 회의의 사무국 역할을 맡게 된다. 다자회의의 성격상 의장국은 각 회원국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회의의 의제와 발표자, 토론자를 미리 선정하고 공동선언의 초안도 만들다. 본회의는 이렇게 만들어진 의제를 수정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그 정도 수준에서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 다음 회의로 결정이 미뤄진다. 이 때문에 전체 논의의 70∼80%를 의장국이 주도하게 된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G20 금융규제안은 건전성 강화에 초점
내년 국내 시행 ‘자통법’과 충돌 없을듯▼
■ 한국에 영향은
주요 20개국(G20)의 각국 정상들이 합의한 금융시장 개혁 원칙은 한국의 경제정책과 결을 같이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역풍’처럼 보이는 부분도 일부 있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 내용은 ‘조화’ 쪽이라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내년 2월 시행될 예정인 자본시장통합법. 이 법은 금융업 간의 장벽을 허물고 다양한 상품을 취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규제완화가 핵심이다. 정부는 은행 지분의 기업 소유를 확대하는 등 소유규제의 완화도 별도로 추진하고 있다.
반면에 G20 합의는 금융규제의 수준을 높이는 방향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G20 선언문이 “금융회사의 경영이나 지배구조 등을 더 강하게 규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건전성 규제와 감독을 강화하라”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통법과 충돌하는 부분은 없다고 보고 있다. 특히 미국 등이 건전성 감독까지 소홀히 한 바람에 금융위기를 불러온 반면 한국은 금융 규제가 국제 기준에 비춰서도 과도하고 불필요하다는 것.
이명박 대통령도 정상회의에서 “국제 금융체제 개선의 기본 방향은 시장 기능을 제약하는 것이 아닌 시장 기능을 정상화하는 방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이 영국, 브라질과 함께 앞으로 G20 금융시장 개혁 논의를 주도할 의장국단에 들어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공동선언문이 국제 신용평가사에 대해 관리감독 및 공시를 강화하고, 준법감독 시스템 도입을 검토하기로 한 것은 한국으로서는 싫지 않은 부분이다. 피치가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내린 것을 계기로 현재 신용평가사의 공정성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은 특히 신용부도스와프(CDS) 관련 규제 강화에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전망된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의 CDS 프리미엄이 과도하게 오르는 등 감독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G20이 “시장경제주의 기본 원칙의 준수를 강조하고 무역과 투자에서 보호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것은 한국의 정책 기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가장 확실한 ‘순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