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는 처리시한이 다가오자 이만섭 국회의장을 불러 “예산안 처리는 헌법에 법정기일이 정해져 있는 이상 반드시 날짜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의장이 “날치기 처리는 안 된다. 야당 총재 시절엔 그렇게 날치기를 반대하더니 지금은 왜 그러느냐”고 하자 YS는 다음 날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불러 ‘처리시한 준수’를 지시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극력 저지로 실패했고, 민자당은 결국 여야 협상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5일 뒤 여야 합의로 예산안이 통과되자 YS도 “결과적으로 잘됐다”며 슬그머니 한발 뺐다.
▷YS가 마치 ‘신성불가침’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했지만 법정 처리시한이 제헌헌법 때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처음엔 그냥 ‘예산안은 국회가 심의·결정한다’라고만 돼 있었다. 법정시한은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2년 12월 헌법 개정 때 삽입됐다. 군사정권답게 국회의 자율보다는 국정의 효율을 우선시한 결과였다. 그래도 이 조항이 문제된 적은 없었는데 정작 문민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최대의 정치적 현안이 돼버린 것이다.
▷올해도 얼핏 보면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다. 물론 한나라당은 12월 2일을 이미 포기했다. 대신 정기국회 마지막 날(12월 9일)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국민이 172석을 부여한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다수결 강행처리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다시 날치기 시비로 정국이 얼어붙을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은 있다. YS는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에서 법정시한 내 처리를 고집했지만, 지금은 매우 절박한 경제위기 속에서 예산안 처리 시한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