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끝없는 질문에 ‘靑보고 공포증’

  • 입력 2008년 12월 6일 03시 00분


내각-靑참모들 상황 숙지 못했다간 혼쭐나

가급적 보고 줄이고 아랫사람에게 미루기도

‘직언’ 통로 막혀 민심전달 제대로 안될 우려

일부 “질책 많이 할수록 가까운 참모라는 뜻”

“대통령 앞에만 서면 왠지 목소리가 입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느낌이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요즘 ‘대통령 보고(報告) 포비아(phobia·공포증)’라는 신조어가 나돌고 있다. 장차관과 대통령수석비서관 및 비서관 등 내각과 청와대의 대통령 참모진 가운데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보고 내용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경우가 많고, 어디에선가 답변이 막힐 수밖에 없는 참모들은 이어질 질책을 의식해 긴장하고 이는 결국 대통령 보고에 대한 공포증으로 발전한다는 얘기다.

○ 질문하는 대통령, 가급적 피하고 보자?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5일 “요즘 청와대 참모진과 내각에서는 질책받는 것을 무서워해 보고를 기피하거나 가급적 보고를 줄이려는 ‘대통령 보고 포비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설프게 준비했다가 크게 지적당하느니 아예 보고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 경우 준비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면서 “완벽할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느라 밤잠을 못잘 지경”이라고 말했다.

일부는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 사안을 아랫사람이 보고해 올 경우 은근히 자리를 피해 다른 사람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게끔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고 한다.

○ 한 장관의 엉뚱한 보고, “대통령님이 좋아하시는 줄 알고…”

최근 한 부처의 장관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 장관은 “우리나라의 이 분야 기술은 2010년이면 이 정도까지 발전되고, 2020년이면…”이라며 향후 계획을 보고했다. 설명을 듣고 있던 이 대통령은 보고를 끊은 뒤 특유의 단답형 질문을 장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때 그 정도까지 기술 발전을 이루면 그 기술이 앞선 선진국은 그때 더 발전해 있을 것 아니겠느냐.”(이 대통령)

“….”(장관)

“그럴 바에는 다른 분야에 더 투자하는 게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이 대통령)

“…. 저, 대통령님이 이 분야를 좋아하시는 줄 알고….”(장관)

이 대통령은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 왜 그 분야의 기술을 발전시켜야 하는지 들으려 했을 뿐인데 장관은 엉뚱한 답변을 한 것이다. 이 장관은 한발 더 나가 부처로 돌아가서는 ‘대통령의 뜻’이라며 이 분야 사업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업은 이내 재개됐다. 대통령의 뜻이 사업을 접으라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장관은 이 사건을 치른 뒤 대통령 보고에 대한 부담이 더 커졌다고 한다.

○ 답변 제대로 못하는 참모들

지난달 26일 대통령수석비서관들은 이 대통령의 질책성 문답 대화법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수석비서관들이 각각 자신이 맡은 분야를 보고할 때 이 대통령이 중간중간 낮은 목소리 톤으로 툭툭 질문을 던지며 수석비서관 개개인을 크게 질책한 것.

청와대 관계자는 “분위기가 대단히 무거웠고, 답변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무려 3시간 40분 동안 이어진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틀리든 맞든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대통령과 토론다운 토론을 벌인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7월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에 대한 대통령 보고가 다소 늦어진 것도 참모진의 ‘대통령 보고 공포증’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사건 발생은 오전 4시 반 정도였는데 대통령 보고는 낮 12시가 다 돼 이뤄졌다”면서 “대통령에게 종합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실 확인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사건과 관련해 발생에서부터 향후 전망까지 꼼꼼히 물을 경우에 대비한 완벽한 보고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대통령-참모 간 상향식 커뮤니케이션 안 돼

대통령에 대한 보고 자체를 꺼리다 보니 대통령에게 정확한 민심 전달은 물론 청와대 참모진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밖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점이 100이라면 대통령은 10 정도밖에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아니다’란 말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서 “이 대통령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사람이면 몰라도 일면식도 없다가 청와대로 들어온 경우 대통령에게 ‘기탄없이’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한 한 참모는 “이 대통령이 많이 질책하는 사람일수록 대통령 자신이 가깝게 느끼는 참모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면서 “이 대통령에게 혼났다고 주눅 들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당당히 하는 참모에게 이 대통령은 더 신뢰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이 인사는 “이 대통령이 겉으론 자신의 의견을 반박하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뒤돌아서서는 그 반박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자신이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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