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단장 공중화장실 앞 3억 화장실 신축공사
1인 360만원 예산들여 시의원 해외연수 나서
정책개발비 몰아쓰려 의원 연말 잇단 토론회
《연말 예산 낭비사례가 올해도 되풀이되고 있다. 멀쩡한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지방자치단체는 그나마 애교로 봐줄 정도다. 일부 시의회에서는 외유성 의혹에도 불구하고 해외출장에 나서는가 하면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에서는 두 달 사이에 30여 회나 몰아치기 정책토론회를 열어 세금을 소진하고 있다. 해마다 개선을 다짐하면서도 예산 낭비 사례가 이어지는 것은 올해 배정된 예산을 다 쓰지 않으면 남은 예산이 불용액(不用額)으로 처리돼 그만큼 내년 예산이 깎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혈세야 어떻게 됐든 내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는 심보다. 특히 올해는 중앙 정부도 딜레마에 처해 있다. 가라앉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확대 정책을 내놓은 데다 재정을 조기에 집행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산을 제대로 안 쓰면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마당에 일정 수준의 예산 누수(漏水)는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예산을 필요한 곳에 쓰는 것과 예산을 낭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는 데는 정부도 동의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이석준 행정예산심의관은 “일각에서 보도되는 외유성 해외출장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며 “외환시장 불안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정부가 해외여행 자제 등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정리=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 쓸곳 없어서? 추경예산 절반 ‘낮잠’ ▼
장애인 지원예산 813억 국고 귀속될 판
재정부 “소극적 예산집행땐 징계” 경고
연말이 되면서 불필요하게 예산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지만 미처 다 쓰지 못한 예산이 그대로 남은 곳도 적지 않다. 처음부터 과다하게 예산을 책정했거나 집행 중에 상황이 달라지면서 남은 돈이 대부분이다.
남은 예산은 정부가 다른 용도로 활용하지 않으면 이월되거나 국고로 귀속된다. 이와 관련해 정부가 내수 살리기와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돈을 풀기로 마음먹었다면 과감하게 예산을 전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못 쓴 돈 대부분 국고로 귀속
보건복지가족부는 10월 말 기준으로 장애인 관련 사업 중 장애수당 478억 원과 장애인차량 세금지원액 335억 원 등 813억 원을 쓰지 못한 상태다. 장애수당은 예산을 짤 때 과다하게 책정됐고 장애인차량 세금지원액은 대상이 축소되면서 돈이 남은 것.
복지부 관계자는 “법적으로 유사한 사업에만 예산을 전용할 수 있는데 마땅한 사업이 없어 대부분 국고로 귀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제도 시행이 연기되면서 남은 차상위계층 의료급여비 지원금 170억 원도 국고로 귀속될 예정.
문화체육관광부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 예산 400억 원이 남아 있는 상태다. 문화부 관계자는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를 반대하는 시위 때문에 집행이 늦어져 내년으로 이월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반면 과감하게 예산을 전용한 사례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10월 가뭄대책을 내면서 연말까지 불용이 예상되는 예산, 예비비 등 800억 원을 전국 저수지 1450곳의 준설 공사에 사용하기로 했다.
농식품부 당국자는 “저수지 준설 사업은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기부양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거쳐 불용이 예상되는 예산을 모두 관련 사업에 넣기로 했다”고 말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사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사업이 아니라서 자체적으로 전용할 수 없는 경우라면 재정부와 협의해 전용할 수도 있다”며 “재정 집행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전용 신청이 들어오면 신속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 재정부 예산 집행 독려에 총력
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11월 말까지 재정집행실적은 188조3000억 원으로 당초 계획(193조4000억 원) 대비 97.4%가 달성됐다.
이는 지난해 11월 말 집행률 97.8%와 비슷한 수준. 하지만 추가경정예산의 집행률은 11월 말 현재 55.8%에 그치고 있어 정부는 최대한 예산 집행을 독려하고 있다.
또 재정부는 내년 상반기에 전체 예산의 60%를 쓰기로 한 만큼 각 부처가 적극 동참하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내년 1월 1일부터 예산을 바로 쓸 수 있도록 2009년 예산 11조7000억 원을 올해 안에 조기 배정하기로 한 것도 하루라도 빨리 돈을 시중에 풀기 위해서다.
재정부 관계자는 “조기 집행을 하는 과정에서 절차를 생략했거나 예산이 다소 낭비됐더라도 고의성이 없으면 면책할 방침”이라며 “반면 담당 공무원의 소극적인 태도로 예산 집행에 차질을 빚을 경우 징계를 내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의원회관 화장실 비데 설치에 8000만원
일부 부처는 해외여행비 등 200억 절약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연말 예산 몰아 쓰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감사원이 매년 관련 감사를 벌이고 올해 역시 8∼19일 100여 개 기초자치단체와 40여 개 중앙행정기관을 대상으로 특별감사를 벌였지만 연말 예산 낭비 사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 불용 처리 되느니 쓰고 보자
충남 홍성군은 최근 2억9000만 원을 들여 자전거도로를 파헤치고 이 자리에 가로수 100여 그루를 심었다. 나무심기 예산을 제때 사용하지 않아 국고에 반납해야 할 위기에 놓이자 서둘러 도로조경사업에 나선 것.
겨울철에 무리하게 나무를 옮겨 심으면 뿌리가 잘려 차갑고 건조한 겨울 날씨에 말라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군은 예산이 불용(不用) 처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사를 강행했다.
경기 안산시의회 의원들은 22∼29일 공공디자인, 신재생에너지사업 등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으로 해외연수를 떠나기로 했다. 연수비용은 1인당 360만 원으로 약 5000만 원 수준. 관광지 방문 일정 등이 어김없이 포함됐다.
시의회 관계자는 “경기 불황으로 찬반 논란이 있었지만 심의를 거쳐 연수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며 “환율도 많이 떨어지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충남 태안군은 상설시장 주차장 입구에 3억 원을 들여 공중화장실을 짓고 있다. 지상 2층짜리인 이 건물 1층은 화장실, 2층은 상인 회의실로 사용할 계획이다.
그러나 새 화장실이 지어지는 바로 앞에는 지난해 말 5000만 원을 들여 단장한 화장실이 있다. 태안군 관계자는 “종전 화장실은 새 화장실이 완공되면 폐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 연말에 30회 토론회 몰려
불필요한 예산 집행을 감시해야 하는 국회도 오히려 연말 몰아 쓰기에 앞장서고 있다. 11, 12월 두 달 사이에 국회에선 30여 회의 정책토론회가 한꺼번에 열려 의원들이 정책개발비를 몰아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사무처는 올해 초 의원실 책상과 의자를 모두 교체했고 이달 초 8000만 원을 들여 의원회관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했다.
중앙 부처 역시 미처 집행하지 못한 예산으로 고심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정부 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피해보상 예산으로 올해 2400억 원을 배정받았지만 진상규명 및 피해자 선정 과정이 지지부진하자 1100억 원만 집행하고 1300억 원은 국고에 반납하기로 했다.
이 밖에 농림수산식품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관련해 농가 지원 예산으로 책정한 3801억 원과 통일부의 남북회담 관련 예산 8억 원 등은 아직까지 집행하지 못해 불용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 예산 아껴 반환하는 사례도
한편 예산을 아껴 국고에 반환하는 곳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통상 국감이 끝난 뒤 고생한 하급 공무원에게 해외 박물관을 둘러보도록 했는데 올해는 이를 없앴고 결국 200억 원을 절감했다.
국회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예산 배정 및 집행계획 수립이 엄밀하지 못하면 다 쓰지 못하는 예산이 나오고 이 때문에 정부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각 부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