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0일부터 계속된 18대 국회의 첫 ‘입법 전쟁’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붕괴와 ‘정치 실종’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18대 총선을 통해 172석이라는 절대적 다수 의석을 확보했지만 정치력 부재와 미숙한 정국 운영으로 야당에 사실상 백기를 들어 ‘개혁 입법’ 추진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 민주당은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 회의장 점거 농성을 무기로 소수 야당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는 했다. 하지만 다수결과 절차에 따른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법치의 전당에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이번 사태에서 나타난 7대 특징을 살펴본다.》
①소수의 몽니
절차-타협을 무력으로 봉쇄… 부정적인 선례 남겨
민주당 의석은 전체의 3분의 1도 안 되는 82석에 불과하다. 이런 소수 야당이 국회법 절차를 제쳐 놓고 ‘몸으로’ 법안 강행 처리를 막았다. 이런 행동은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는 국회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또 국회법 절차를 무시하고 물리력을 행사해 목표를 관철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은 앞으로 국회 운영에 두고두고 나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상임위에 각종 법안을 상정하는 것조차 물리력으로 막은 것은 국회와 국회의원의 기본 의무를 스스로 내팽개친 것이나 다름없는 ‘생떼’라는 지적이다.
명지대 김형준(정치학) 교수는 “야당이 절차와 과정을 무력으로 봉쇄시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했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의 원칙이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②무력한 다수
172석 국민 뜻 반영 못하고 오히려 내부분열 노출
한나라당은 법안 전쟁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목표와 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다수 여당이 시종일관 무기력으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나라당 원내지도부는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할 중점법안을 114개에서 85개로 줄인 뒤 이 가운데 쟁점이 큰 13건은 야당과 합의처리 하겠다며 먼저 양보했다. 이러면서 72건 법안의 지난해 말 통과를 자신했으나 결국 해를 넘겼다. 이런 와중에 당 내부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눠졌다. 막판에는 박근혜 전 대표가 법안 처리를 주도해 온 여당 지도부와 강경파 주류를 비판하는 발언을 불쑥 내놓는 바람에 여당 내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초래하기도 했다.
③실종된 중도
강경파 목소리만 가득… 중진들 역할 사실상 전무
여야 대치 과정에서 정치 경험이 풍부한 여야 중진들의 막후 역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강경파 목소리만 득세했을 뿐이었다. 여당 중진들은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야당과 접촉하지도 않았다. 한때 양당의 3선 이상 일부 중진 의원들이 협상을 돕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지만 강경파와 지도부의 눈치를 보다가 막판에 회동을 취소했다.
민주당의 한 전직 의원은 “과거에는 여당과 야당이 싸워도 막후에서 대화로 협상을 이끌어내는 ‘정치’가 있었다”며 “2003년 민주당이 신당파와 구당파로 갈라져 피 터지게 싸울 때도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근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④조율못한 靑
청와대-국회 ‘불통’ 원망만 있고 국민설득은 없어
청와대도 컨트롤 타워로서 제 역할을 못했다. 청와대는 당청 간 의견 조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또 쟁점법안에 대한 김형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처리를 내심 원하면서도 김 의장이 기대와 다른 결정을 할 때 비판만 했을 뿐이었다. 이번 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김 의장의 관계는 한마디로 ‘불통(不通)’이었다는 게 여권 관계자의 얘기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쟁점법안 처리를 2월로 미루자”며 정부의 방침과 다른 얘기를 하는 등 당청 간 이견 조율 작업도 부족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각종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며 국회를 원망만 했지 ‘왜 경제 살리기와 개혁에 절실히 필요한지’에 대한 설득 작업은 없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⑤줄타기 의장
“직권상정 - 회기연장 불가” 협상의 균형추 깨뜨려
김형오 국회의장은 국회의 권위와 질서를 세워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입법부 수장으로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폭력 저항’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김 의장은 특히 여야가 막판 협상 타결에 가까워졌을 무렵 ‘이번 임시국회에서 상정되지 않고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법안의 직권상정을 하지 않고 회기 연장도 하지 않겠다’고 밝혀 여야 협상의 균형추를 깨뜨렸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⑥극렬 몸싸움
정치권 손놓고 국회사무처가 나서 농성해산 시도
최장 기간의 본회의장 점거 농성과 해산 시도 작전이 이어지고 고소 고발이 잇따르며 국회사무처가 법안 전쟁의 전면에 나섰다.
국회사무처는 3일과 4일 6차례에 걸쳐 국회 경위와 방호원들을 동원해 민주당의 로텐더홀 점거 농성 해제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경위 3명이 부상당해 입원했다. 또 김형오 의장의 질서유지권 발동에 따라 서울경찰청 소속 9개 기동대 900명의 병력 지원을 요청해 본청 주변에 배치하기도 했다. 국회 관계자는 “과거에도 질서유지권이 발동된 적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번처럼 삼엄하게 검문을 하고 출입자를 엄격하게 통제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⑦진기록 양산
본회의장 12일 점거 ‘최장’ 불명예… 해머 전투도
민주당은 지난해 12월 18일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단독 상정한 다음 날부터 1월 1일까지 14일 동안 국회의장 집무실을 점거했다. 또 본회의장은 지난해 12월 26일부터 1월 6일까지 12일간, 본회의장 입구 로텐더홀에서는 지난해 12월 26일부터 1월 5일까지 11일간 농성을 벌였다. 이 모두 국회 최장 기록이다.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은 농성 해산 시도 과정에서 무용지물로 전락해버렸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하는 동안 회의장에 진입하기 위해 전기톱과 쇠지렛대, 해머까지 동원했다. 20여 년 만에 소방호스도 투쟁 무기로 등장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등산용 밧줄로 몸을 묶은 뒤 서로 연결해 강제 해산작업에 대비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도 스스럼없이 연출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