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증 확산-지지층 이탈조짐 위기감
중진들 “어영부영 안돼” 정면돌파 주문
이명박 정부 출범 1주년을 맞은 25일 한나라당이 여야 간 최대 쟁점인 미디어 관계법을 관련 상임위에 기습 상정하는 승부수를 던진 것은 집권 2년차를 맞은 여권의 절박한 상황 인식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직권상정은 전날 오후 박희태 대표와 홍준표 원내대표, 주호영 원내수석부대표, 고흥길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김영선 정무위원장 5인 회동에서 결정됐다. 이 자리에서 직권상정의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결국 “더는 민주당에 끌려 다닐 수 없다. 정면 돌파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는 후문이다.
그동안 미디어 관계법 등 쟁점법안 논의는 민주당의 원천적인 법안 상정 거부로 2∼6개월이나 겉돌면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내에서는 올 한 해가 사실상 이명박 정부의 성패를 가늠할 만큼 중요한 시기이지만 민주당의 ‘시간 끌기’ 전략에 말려 자칫 상반기를 허송세월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미디어 관계법뿐만 아니라 개혁 법안의 상징으로 여겨진 금산분리 완화 법안도 정무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에 회부조차 안됐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171석의 불임정당’ ‘역시 웰빙당’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게다가 친이계(친이명박계)와 친박계(친박근혜계) 간 갈등이 수시로 노출되면서 주요 법안에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따로 노는 모습까지 나타나는 등 여당 전체가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청와대와 여당 간의 상호 불신도 커지고 이 대통령과 여당에 실망한 보수층의 지지 기반 이탈 가능성까지 감지되자 여권 수뇌부는 결국 2월 국회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결단을 내린 데는 청와대의 태도도 작용했다.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맹형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 청와대 핵심 인사는 최근 한나라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들에게 번갈아가며 “개혁입법이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의원들을 두루 만나면서 경제 살리기 관련 법안을 포함해 쟁점 법안 처리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강경모드를 조성해 나간 것도 당 지도부에 압박이 됐다.
이날 오전 열린 당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이 전 부의장은 강경방침을 주문했다. 박종근 의원 등 상당수 중진도 홍 원내대표에게 “어영부영해선 안 된다. 강력히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런 여권 내부의 기류를 볼 때 이른바 ‘MB 법안’의 국회 처리를 위한 한나라당의 움직임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 관계법의 상임위 상정은 그 신호탄이라는 것이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한나라 연막작전에 민주 허 찔려▼
■ 직권상정 막전막후
계류된 다른 법안 질의응답후
“방송법등 상정” 의사봉 두드려
민주 “날치기다” 고성-몸싸움
손바닥으로 책상 쳐 산회 선포
25일 미디어 관계법안의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 직권상정은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고흥길 위원장(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3시 48분 갑자기 “방송법 등 22개 미디어 관계법에 대한 법을 일괄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의사봉을 들었다.
선진과창조의 모임 간사인 이용경 의원이 3당 간사의 의사일정 협의에 대한 발언을 마친 직후였다.
그전까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대상으로 계류 법안 의결을 위한 질의응답이 있었기 때문에 직권상정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민주당 의원석에서 “뭐하는 거야” “날치기다” 등의 고함이 터졌다.
민주당 간사 전병헌 의원이 의장석으로 황급히 다가가 고 위원장의 왼팔을 잡으며 상정을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고 위원장이 “미디어법 등 22개 법안을 상정합니다”라며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린 뒤였다.
민주당 의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장석으로 향했고 한나라당 일부 의원이 고 위원장을 에워싸면서 여야 의원들이 뒤엉켰다. 고성과 몸싸움 속에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고 위원장의 넥타이를 잡아챘다.
고 위원장은 “산회를 선포한다”며 의사봉 대신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친 뒤 국회 사무처 직원 등에 둘러싸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민주당 의원들이 뒤쫓아 가며 “왜 도망가느냐”라고 소리를 질렀고 회의장에 남은 의원들은 “이걸로 국회는 끝”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의원은 허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유 장관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회의가 끝난 거냐”며 영문을 몰라 했다.
이어 열린 민주당 긴급의원총회는 “한편으로는 미소를, 한편으로는 비수를 드리운 한나라당의 사기극에 속았다”는 자탄과 분노로 들끓었다.
정세균 대표는 지난해 12월 18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단독 상정한 박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에 빗대 “고 위원장이 ‘제2의 박진’이 됐다”고 질타했다.
박병석 정책위의장은 “한나라당이 아침까지도 대화로 풀겠다고 했고 한승수 국무총리도 원만한 진행을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며 “처음부터 합작 사기극을 벌였다”고 분개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산넘어 산’ 쟁점법안 처리 이제 첫발
여야 토론조차 어려워
물리적 충돌 가능성도▼
여야 대치 속에 3개월 동안 국회를 짓눌러온 미디어 관계법이 25일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 상정돼 공식적인 논의 절차가 이제 첫걸음을 떼게 됐다.
정부 여당은 방송미디어산업을 통해 미래의 성장동력을 확보한다는 구상을 갖고 지난해 정부 출범 이후부터 미디어 관계법 정비를 추진해 왔다.
2012년 디지털방송시대 개막에도 불구하고 국내 방송사들은 열악한 자본력 탓에 투자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자칫 미래 핵심 부가가치를 창출할 미디어산업이 경쟁국에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진 것도 정부 여당이 미디어 관계법 정비를 서두르게 된 배경으로 꼽힌다.
수십조 원의 현금 유보금을 갖고 있는 기업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방송 규제를 대폭 풀 경우 미디어산업에 자본이 유입돼 투자가 활발해지고 일자리도 늘어나게 될 것으로 정부 여당은 보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KBS와 MBC 등 지상파 방송이 복잡한 규제의 틀 속에서 보호받으며 투자와 미래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한 채 정권의 입맛에 맞는 방송을 해왔다”며 “뒤처진 방송의 경쟁력을 높이고 시장원리 속에서 경쟁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미디어 관계법을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날 미디어 관계법 상정은 이제 법안 처리를 위한 첫 단추를 꿴 것에 불과하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다.
민주당이 상임위 일정을 거부하기로 한 만큼 당장 26일부터 여당 단독으로 토론을 진행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여당은 상임위 소집요구서를 제출해 임시국회 기간 중에 미디어 관계법에 대한 토론을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문방위 회의실을 점거 농성하고 있어 농성을 풀지 않으면 토론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상임위 법안 통과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상임위 관문을 넘어서더라도 민주당 소속인 유선호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법제사법위원회도 난관이다. 문방위에서 법안이 강행 처리될 경우 법사위를 통과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희박하다. 이 경우에는 김형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통해서만 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할 수 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