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잃은 신양자씨 “홀몸으로 아들 키우며 어렵게 생계… 눈물도 말랐다”
아들 묻은 김동수씨 “화염병 소리만 들어도 울화통… 아내는 심장병 얻어”
동생 보낸 정유환씨 “靑탄원 소용없어… 경찰도 눈치보느라 추모식 꺼려”
부산의 한 재래시장에서 2평 남짓한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신양자 씨(55)에게는 이제 흘릴 눈물도 없다. 지난 20년 동안 겪은 마음고생 때문에 남들이 평생 흘릴 눈물을 이미 쏟아냈기 때문이다.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 시위에서 감금된 전경을 구하려고 들어갔다가 화염병에 목숨을 잃은 남편 최동문 경위를 떠나보낸 뒤부터 그의 삶은 굴곡 그 자체였다. 신 씨는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시어머니는 이 사건으로 병을 얻어 3년을 앓다 아들 뒤를 따라갔다. 시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들 이름을 불렀다.
2002년 5월 2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가해 학생 46명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했을 때 그는 목 놓아 울었다. 남편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인지…. 신 씨는 대한민국을 원망했다.
7명의 순직경찰관 유족은 “나라를 위해 일하다 목숨을 잃은 그들이 반(反)민주 경찰이란 말이냐. 결국 개죽음했다는 것이냐”며 오열했다. 26일 기자와 만난 신 씨는 “이제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상당수는 지금도 심장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가슴에 묻은 아들 생각에 편히 잠을 잔 날이 없다”고 말했다.
광주에 살고 있는 김동수 씨(82)도 동의대에서 아들 김명화 수경을 떠나보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민주화보상심의위의 결정이 난 뒤 심장병을 얻었다. ‘화염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김 씨는 “국가에 목숨을 바친 아들은 죄인이 되고 아들을 죽인 사람은 민주화운동자로 둔갑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동의대에서 장남 서원석 수경을 잃은 서정길 씨(63·경북 포항시 거주) 부부도 10년 넘게 신경안정제와 혈압 약을 먹고 있다. 서 수경은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중화상을 입고 23일간 병원에서 투병하다가 결국 숨을 거뒀다. 말도 못하고 손가락도 사용할 수 없자 그는 마지막엔 발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효도하지 못하고 떠나 죄송합니다. 이제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모든 것을 용서하세요’라고 적었다고 한다. 26일 기자와 만난 서 씨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다 말을 잇지 못했다.
1981년 남편과 사별하고 동의대에서 둘째 아들(조덕래 경사)까지 잃은 황기순 씨(81·여·경남 함안군 거주)는 1990년대 초 심부정맥과 폐질환으로 20년 가까이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황 씨는 요즘도 아들 제사를 직접 챙기고 있다. 고인의 형인 조경래 씨(55)는 “어머님이 제사를 준비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신다”고 전했다.
고 정양환 경사의 둘째 형인 정동환 씨는 민주화보상심의위 결정 소식을 TV로 보다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었다. 넷째 형 정유환 씨(50·대구 거주)는 유족 대표로 지난 20년간 궂은일을 도맡아 왔다. 2002년 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 이후 헌법소원도 냈지만 ‘청구 자격이 없다’며 각하됐고, 청와대에 낸 탄원서는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도 그들의 탄원에 눈을 감았다. 그는 “2002년 이후에는 경찰이 정권 눈치를 보느라 추모식에도 잘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 모성태 수경의 어머니 최정자 씨(70·경기 수원시 거주)도 아들을 보내고 심장병을 얻었다. 아버지 모종칠 씨(74)는 “자식은 떠나보냈지만 후손을 위해서라도 민주화운동 결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동의대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징역 2년∼무기징역을 선고받은 31명의 가해자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모두 사면됐다. 이들은 2002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받은 뒤 1인당 평균 2500만 원, 최대 6억 원의 보상금도 받았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부산=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대구=정용균 기자 cavat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