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1곳… 내일 5곳… 줄줄이 가동중단 위기
“정치적 리스크 너무 커 더는 투자하지 않겠다”
북한이 13일부터 사흘째 개성공단을 왕래하는 육로를 차단하면서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당장 개성 현지로 물자를 공급할 수 없어 생산에 차질을 빚은 데다 생필품 재고에 여유가 없어 주재원들의 기본적인 생활마저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기업 대표들은 개성공단에서 사업장을 계속 운영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털어놨다.
○ “기업활동 마비로 고사 직전”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의 협의체인 개성공단 기업협의회는 15일 성명을 내고 “개성공업지구법상 기업 활동 보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통행을 즉각 정상화하고, 남북 당국은 이런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해 달라”고 촉구했다.
협의회는 성명서에서 “이번 통행 제한으로 입주 기업들의 생산에 필수적인 원·부자재 및 생필품 등 모든 자재의 공급이 차단돼 개성공단 내 기업 활동이 완전 마비됐다”며 “또 국내외 바이어들의 신뢰를 상실해 남북 화해의 상징이던 개성공단이 고사(枯死) 상태에 이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협의회는 같은 내용의 촉구문을 북측에도 전달했다.
이와 관련해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90% 이상은 통행차단 조치가 지속되면 1주일 내로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공단 현지에서 일부 기업 관계자들이 중심이 돼 72개 입주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5일 기준으로 이미 10곳이 생산을 멈춘 것으로 확인됐다.
가동중단업체 수는 누적 기준으로 △하루 뒤 31개 △이틀 뒤 36개 △사흘 뒤 52개 △나흘 뒤 56개 △닷새 뒤 67개 △엿새 뒤 68개의 추세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또 모든 업체가 ‘현재의 연료와 음식물 비축분으로는 1주일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고 응답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B기업 대표는 “일부 입주기업의 경우 주재원들이 묵는 숙소의 난방용 가스와 식량 등이 며칠분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려했다.
○ 기업들, 추가 투자취소 가능성도
북한이 16일 이후 개성공단의 통행을 전면 재개해도 이번 사태로 인해 개성공단을 둘러싼 ‘정치적 리스크’가 이미 크게 높아져 향후 공단의 운명은 밝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일부 입주업체는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더는 설비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배해동 ㈜태성산업 대표는 “상당수 입주업체는 최악의 경우 기존 설비를 모두 포기하고 개성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다른 입주기업 대표는 “이미 투자한 각종 설비 때문에 마음대로 철수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신규 입주를 추진하던 기업들도 입주 자체를 머뭇거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기업들이 북측 근로자의 저임금(월 57달러)을 노리고 위험을 감수하며 입주했지만 이번 사태로 경영 불확실성이 극도로 증폭돼 이 같은 이점이 퇴색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측 근로자에 대한 임금삭감 등 추가 ‘프리미엄’이 보장되지 않는 한 개성공단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 일부 기업 관계자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여론을 호도하며 우리를 개성에 유치했다”며 ‘정부 책임론’을 강조하고 있지만 투자의 최종 판단은 기업인이 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북녘만 바라보는 정부
뾰족한 대책 없어… 사실상 억류에 “통행차질” 표현
玄통일 “상황 엄중히 주시… 공단 훼손은 원치 않아”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15일 국민 726명이 개성공단에 사실상 억류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과 정부가 의지대로 정책을 추진하기 힘든 ‘무기력함’ 탓이다.
▽북한이 칼자루 쥔 불확실한 상황=정부 당국자들은 이날 ‘억류’라는 말 대신 ‘통행의 차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서울에서 KT 통신망으로 개성공단과 연락이 되고 개성에서는 개성공단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남측 기업과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사이에 소통이 되고 있다. 북한 총국과 군부도 소통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15일 1명, 14일 6명이 귀환했다.
그러나 정부로서는 북한이 언제 통행을 재개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이 9일 예고한 것은 한미 연합군사연습 ‘키 리졸브’가 끝나는 20일까지 군 통신망을 차단하고 군사분계선에 엄격한 군사적 통제를 하겠다는 것뿐이다.
앞으로의 일정은 순전히 북한 군부의 뜻에 달려 있다. 16일 통행을 전면 재개할 수도 있고 20일까지 안 할 수도 있다. 16일부터 아주 제한적인 인원만 오가도록 할 수도 있다.
▽북한에 코가 꿰인 무기력한 상황=북한은 9일 이후 개성공단 남측 인력의 통행 차단을 무기로 한국 정부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15일 “개성공단이 안보 군사 정치 상황의 영향 없이 운영되는 확고한 원칙이 필요하다”며 “개성공단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대책에 대해선 “상황을 엄중하게 보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최악의 경우 북한이 20일까지 통행을 차단해도 정부로선 이에 대응할 뾰족한 수단이 없다. 당장 16일 통행이 재개돼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언제라도 개성공단 통행을 차단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개성공단행(行)을 허용하기도 부담스럽다.
확실한 대안은 당분간 개성공단을 비우도록 기업인들을 설득하는 것이지만 우리 국민이 사실상 억류돼 있는 상황에선 어떤 말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 당국자는 “통행이 재개된 뒤의 일은 그때 이야기하자”며 답변을 피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