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흐름 상시 모니터링으로 ‘버블 부작용’ 최소화해야

  • 입력 2009년 3월 21일 02시 58분


올해 예산 284조… 추경만 27조∼29조… ‘돈 풀어 경기부양’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 경제전문가 6인의 진단

《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인 284조5000억 원의 올해 예산 집행을 시작한지 채 3개월도 안 돼 역시 사상 최대인 27조∼29조 원의 ‘민생안정을 위한 일자리 창출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 24일 발표할 예정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서둘러 추경을 편성해야 한다는 지적은 올해 초부터 나왔지만 이를 공론화한 것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그는 2월 10일 취임하자마자 추경 편성 방침을 밝히는 등 공격적으로 정부 돈을 풀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냈다.

정부가 이처럼 재정확대 정책을 펴는 것은 한국 경제의 두 축인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은 작년 11월부터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소비와 투자 등 내수지표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국내외 경기가 급격히 추락하는 상황에서 어떤 정부도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데 많은 경제 전문가가 동의하고 있다. 다만 재정확대의 여파로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

방향-규모 적정성

수출-내수 적신호… 공공부문 수요 늘릴 수밖에 없어

경제의 양대 축인 수출과 내수의 동반 추락으로 산업 활동이 크게 위축되면서 지난달 일자리는 1년 전보다 14만2000개나 감소했다. 지난달에는 실업자가 92만4000명으로 불어나는 등 ‘실업자 100만 명 시대’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상황이다.

이런 점 때문에 경제 전문가들은 재정확대의 필요성에 대해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성균관대 김준영 교수(경제학)는 “내수와 수출이 기대만큼 경기부양을 뒷받침할 수 없다면 공공부문에서 수요를 증가시켜야 한다”며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을 늘리는 정책 방향은 맞다”고 말했다.

추경 규모에 대해서도 ‘적정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2% 이상 떨어질 것으로 가정할 때 (27조∼29조 원의 추경 예산은) 합리적인 규모”라고 평가했다. 이화여대 전주성 교수(경제학)도 “재정지출이 적정 수준을 넘으면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되기보다 재정 낭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경기 침체로 줄어들 세수(稅收)를 보전하면서 저소득층 지원, 성장동력 확충 등을 하는 데 30조 원 정도는 적정 규모”라고 말했다.

재정을 퍼붓는 방식의 대응책이 낳을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전남대 김영용 교수(경제학)는 “거품이 일었다 꺼지면서 온 것이 지금의 불황인데 다시 거품을 일으켜 불황을 극복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추경을 하더라도 꼭 필요한 데만 돈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속도에 문제없나

예산집행 작년보다 2배 빨라져… 추경편성은 늦은 감

정부는 올해 상반기에 전체 예산의 60%를 집행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각 부처에 예산을 서둘러 풀라고 독려하고 있다.

2월 말 현재 재정집행 진도율은 23.3%로 지난해 같은 기간(12.2%)보다 2배 정도로 빨라졌다. 통상 하반기에 편성하던 추경을 상반기로 앞당긴 것도 집행속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경기 하강이 워낙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어 추경 편성 시점을 더 앞당겼어야 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거시경제실장은 “지난해 4분기(10∼12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분기(7∼9월)보다 5.6% 감소한 점을 고려하면 정부가 더 빨리 대처했어야 했다”며 “추경이 4월 국회에서 통과돼도 5월경에나 집행되기 때문에 늦은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상반기에 극심한 고용대란(大亂)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치권의 분열로 추경 논의가 장기화돼 예산이 조기에 집행되지 못하면 추경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 어렵다고 우려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았다. 이미 여야의 ‘입법 전쟁’ 등으로 각종 민생법안이 뒤늦게 처리돼 정부의 각종 경제 살리기 대책 효과가 반감됐다는 견해도 있다.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추경예산이 너무 늦게 집행되고, 국내외 경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면 상승세를 탄 경기를 지나치게 부추기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재정투입 효율성

구멍난 복지전달체계… ‘예산 누수’ 감독 강화 서둘러야

재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집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국고(國庫)에서 흘러나간 돈이 민생 현장에 풀리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데다 제대로 풀리고 있는지 정부가 가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재정은 중앙 부처에서 나가는 순간 집행된 것으로 간주되는 탓에 정부는 재정집행을 한 것으로 집계해도 지원을 받아야 할 당사자에게는 전달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횡령 사건이 끊이지 않는 허술한 복지전달체계도 효율을 떨어뜨린다. 특히 이번 추경 예산의 상당액을 복지전달체계를 충분히 ‘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행하고 있어 사후 관리나 감독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장관이 최근 “추경이 이제 막바지 단계지만 걱정되는 것은 복지전달 체계”라고 말한 것도 현행 체계로는 ‘예산 누수’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경제연구실장은 “복지전달체계에 대해서는 정부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만 단기간에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과제”라며 “실효성은 물론 집행과정의 점검을 꼼꼼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병규 본부장은 “일자리 창출, 사회복지체계 강화, 인프라 구축을 통한 경제효율성 강화에 추경 예산을 투입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혜택을 받는지 지속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건전성 영향

국가 채무비율 아직 여유… 경제난 장기화땐 ‘시한폭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해도 정부의 재정팽창이 결국 한국의 재정 건전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2007년 말 현재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GDP의 33%.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채무 비율이 70∼80%인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재정확대 여력은 충분하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다.

또 지금처럼 비상경제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건전성을 유지해 온 만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공기업을 포함한 범정부 부문의 부채 규모는 정부의 공식통계보다 훨씬 크다. 또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 하반기에 ‘2차 추경’을 편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재정 건전성은 더 나빠질 수 있다. “1990년대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국가 부채가 급증했던 일본의 사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대대적인 재정확대 정책을 내놓자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뉴욕타임스를 통해 “오바마 행정부는 돈쓰기를 좋아한다”고 비판한 것도 재정적자의 후유증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전주성 교수는 “추경과 관련한 재정건전성 우려를 없애려면 ‘한시적’인 복지 지원책을 중심으로 재정 지출을 늘려야 한다”며 “적자 구조가 고착화되면 재정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민간경제 후유증

경기회복기 과잉 유동성으로 인플레 문제 불거질 수도

추경 편성은 장래에 국민이 갚아야 할 빚인 재정적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재정적자는 ‘구축(驅逐)효과’라는 부작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구축효과란 정부가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 시중의 돈을 흡수하는 바람에 민간의 자본 조달이나 투자가 위축되는 현상을 말한다.

돈이 많이 풀려 물가가 상승하면 화폐의 명목 금액을 기준으로 부과되는 세금이 늘어 결과적으로 민간의 부(富)가 정부로 이전되는 ‘인플레이션 세금(Inflation Tax)’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재정부는 추경 재원으로 쓸 적자국채 발행을 최소화할 방침이고, 시중의 유동성도 풍부한 만큼 구축효과의 소지는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또 생활필수품 가격 안정을 위해 시장 감시도 강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올해 국고채 발행 한도가 사상 최대인 74조3000억 원으로 늘어난 데다 추경용 적자 국채까지 시장에 쏟아질 경우 향후 시장교란 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는 여전하다.

이와 함께 정부가 푼 돈이 경기회복기에 독(毒)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준영 교수는 “경기가 회복국면으로 돌아서면 유동성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정부가 투입한 자금을 회수하는 문제와 인플레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며 “경제 버블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도 세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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