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임자 인선후 연루 드러나면 후폭풍
검찰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수사를 본격화하면서 이 사건의 불똥이 3개월 가까이 지연되고 있는 후임 국세청장 인선 문제로 튀는 양상이다. 박 회장이 정치권 유력 인사뿐 아니라 전현직 국세청 간부들에게도 집요하게 로비했다는 의혹이 확산되면서 정부가 후임자를 섣불리 인선하지 못해 국세청장 공석 사태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박 회장의 로비 대상으로 전현직 국세청 고위 간부 4, 5명의 이름이 거론되자 국세청은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아직까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전직이든 현직이든 국세청 간부의 혐의가 드러난 것은 없다.
하지만 “모 인사가 박 회장에게서 ‘잘 봐 달라’는 부탁과 함께 봉투 5개를 받았다더라”는 식의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박 회장이 지난해 세무조사를 받을 당시 전직 국세청장을 동원해 한상률 당시 청장(1월 19일 퇴임)에게 자신의 구명을 부탁했다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한 전 청장은 박 회장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함께 2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추부길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이 검찰에 체포되기 전인 지난달 중순경 미국으로 출국해 ‘기획출국설’ 등 다양한 추측을 낳고 있다.
‘박연차 리스트’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인물 중에는 한 청장이 사퇴한 이후 차기 청장 후보 물망에 오른 이들도 포함돼 있다. 이런 점을 들어 국세청 안팎에서는 국세청장 인사 시기가 늦어지는 것은 물론 국세청 내부인사가 발탁될 가능성도 낮아졌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청와대가 국세청 출신을 청장 내정자로 발표했다가 나중에 박 회장 로비와 관련된 혐의나 의혹이 제기될 경우 부실 인사 논란과 세정(稅政) 혼선 등 감당하기 어려운 후폭풍이 닥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세청장 인사가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는 5월 이후로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면 국세행정 사령탑은 당분간 공석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청장 자리가 3개월 가까이 비어 있는 현 상황도 1967년 국세청 개청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현재 박 회장은 검찰에서 정치인에게 금품을 제공한 사실은 대체로 인정하면서도 국세청과 관련된 대목에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은 내부인사 발탁과 외부인사 기용을 놓고 저울질해 온 청와대의 국세청장 인선 방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번 사건에 전현직 국세청 간부가 연루돼 형사처벌을 받는다면 국세청을 대대적으로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외부인사를 청장으로 기용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국세청 조직도 큰 폭의 개편이 불가피해진다. 반대로 국세청이 한 명의 연루자도 없이 이번 태풍을 무사히 비껴간다면 내부인사 발탁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靑 “이달 셋째주나 넷째주에 인사”
이에 대해 청와대는 10일 “박 회장 수사와 국세청장 인선은 무관하다”며 “국세청장 후보군에 대한 검증을 계속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달 셋째 주나 넷째 주쯤 청장 인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동안 국세청 외부인사 가운데 개혁적인 인물을 물색했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인사가 지연됐다”며 “낙점하려는 특정 후보가 박 회장 로비에 연루돼 인선이 지연되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이명박 대통령이 염두에 두고 있는 특정 후보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해 청장 인사가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청와대 측 설명처럼 국세청장 인사가 곧 단행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국세청 출신의 유력한 후임 후보가 이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이미 검증됐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은 새로운 인물이 전격 발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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