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해서 정부 자극할라…”
남북출입사무소 회견 취소
21일 개성공단 입주업체인 에스제이테크 유창근 대표의 하루는 숨 가빴다.
개성공단 입주기업협의회 부회장이기도 한 유 대표는 회사 일을 뒤로 미루고 이른 아침부터 경기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CIQ)를 찾았다. 이날 입주기업협의회가 정부의 남북협의와 관련해 CIQ에서 긴급 이사회를 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주업체들의 회의 장소는 오후 1시경 갑자기 서울 협의회 사무국으로 바뀌었다. 유 대표는 다시 부랴부랴 서울 중구 서소문동 사무국으로 차를 돌렸다. 북측의 개성공단 출입 차단으로 큰 손실을 본 일부 입주업체 대표들이 CIQ에서 회의하자고 주장했지만 “괜히 ‘오버’해서 정부를 자극하지 말자”는 신중론이 막판에 힘을 얻은 것. 양창석 통일부 남북출입사무소장은 “몰려든 취재진으로 CIQ 내 공간이 부족해 장소를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고만 답했다.
서울로 달리는 차 안에서 긴 한숨을 내쉬는 유 대표의 표정에서 입주업체 대표들의 복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 문제가 제일 큰 걱정입니다. 지금도 바이어들이 떠나고 있는데, 만약 신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우리 입주기업들은 참….”
오후 4시 30분 서울 입주기업협의회 사무국. 유 대표를 비롯한 10여 명의 입주기업 대표들이 굳은 표정으로 건물 지하 커피숍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더는 내려갈 데가 없는 상황까지 왔지만 그래도 개성공단의 미래를 낙관한다”고 입을 모았다.
개성에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의류를 생산하고 있는 대일유니트 문주종 대표는 후발업체로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남들보다 늦게 개성공단에 공장을 세워 원하는 수준의 충분한 인력을 구할 수 없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고급 백화점에 납품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싶었는데 지난달 청천벽력처럼 북측이 출입차단 조치를 했다. 당장 백화점에 납품할 옷 6만 벌을 제때 공급하지 못해 발주사의 신뢰를 잃었다. 간신히 통행금지가 풀려 공장에 달려갔더니 1000만 원어치 이상의 원사(原絲)가 사라지고 없었다. 문 대표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내 나이 칠순을 넘겨 돈만 벌기 위해 온 게 아닌 만큼 계속 사업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다른 입주기업 대표들의 마음도 한결같았다. 남북협의가 늦어지고 있다는 소식에도 이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의류업체 에스엔지의 정기섭 대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공장을 돌린 지 6개월 만에 북측 근로자들의 푸석했던 얼굴에 ‘뽀얀’ 윤기가 흐르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그걸 생각할 때마다 전 개성공단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파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