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관계 순탄치 않아
통미봉남 기대 어긋나
내부 위기 타개책 고심
“동부전선 MDL 표식물 이전안하면 자위 조치”
휴전선 긴장 조성도
북한이 특유의 ‘강온 양면 전술’로 남북관계의 현상 타개를 꾀하고 있다. 개성공단 계약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휴전선 일대에서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한편으론 개성공단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남북 대화를 재촉하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양면 전술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은 북한의 특기.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국내 사정과 국제관계,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북한과의 협상에 과도하게 기대하는 것도, 기대를 안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말했다. 북한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종잡을 수 없는 북한의 행보
북한은 21일 방북한 남측 대표단을 내내 혼란스럽게 했다. 북한 대표단은 ‘돈을 더 내놓지 않으려면 개성공단에서 나가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공단을 유지 발전시키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떠나는 남측 대표단에 협상 날짜를 빨리 잡자고 재촉하는 등 남측과의 대화에 조급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던 북한이 22일에는 휴전선에서 긴장을 조성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한국군이 최근 동부전선 군사분계선(MDL)의 표지물 제0768호를 북쪽으로 수십 m 옮겨 꽂는 엄중한 군사적 도발행위를 했다”며 “이를 원래 위치로 옮기지 않으면 자위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우리 군은 북한이 관리하는 이 표지물에 접근했거나 옮긴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북한은 5일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이후 16일 남북 당국 간 접촉을 제의했다가 19일에는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을 내세워 “MDL에서 서울까지는 불과 서울 50km 안팎”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 북한, 왜 이러나
북한의 최근 행보는 북한 지도부의 불안감과 초조함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우선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해빙 국면을 맞을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이란에 쏟는 정도의 관심을 북한에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에 ‘노기’를 드러냈다고 마크 긴즈버그 전 모로코 주재 미국대사가 16일 자신의 블로그에 중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북한은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을 통해 한미 간 균열을 유도했지만 한미 양국은 지난달 진행된 한미 연합군사연습 ‘키 리졸브’ 등을 통해 굳건한 동맹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그동안 계속적인 대남 압박 공세로 한국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누그러뜨리려던 시도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내부 상황도 북한 지도부의 편이 아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출생 100년, 김 위원장 출생 70년이 되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정해 놓은 상태. 주민들에게 제시한 비전을 달성해야 할 기간이 앞으로 3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북한 경제는 여전히 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5일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두드렸다”고 홍보하는 등 ‘쇼와 슬로건의 정치’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 북한은 향후 선택은
개성공단의 운명은 결국 북한이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먼저 남북관계의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남한과의 단절을 심화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미국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려 할 수 있다. 정부 당국자는 “지금까지 남측 사람들은 ‘북한이 달러박스인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21일 조치는 남측 사람들을 스스로 걸어 나가게 한 뒤 다른 투자자들을 유치하겠다는 뜻”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북한은 당분간 북-미관계가 호전될 때까지 남북관계의 ‘전략적 위기관리’를 추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개성공단 문제를 풀기 위한 남북 당국 간 협상의 장을 통해 남한의 대북정책 수정을 요구하고 쌀과 비료 등 대북 지원을 노릴 수 있다. 한 당국자는 “북한은 지금 마음이 급한 상태”라며 “개성공단 문제를 제기해 대화의 끈을 만든 뒤 현재 가장 급한 비료 지원 문제 등을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