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측은 통지문 읽다
北 저지로 문건만 전달
北 “접수 안한다” 돌려줘
南 지나친 저자세 논란
21일 오후 8시 35분 개성공단 내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건물에 마련된 회의장. 북한에 억류된 A 씨의 석방과 접촉 장소를 놓고 이날 오전 9시 반부터 11시간 동안이나 승강이를 벌이던 남북 정부 당국자들이 가까스로 마주앉았다. 양측 대표단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총국 제1부국장을 비롯해 3, 4명으로 구성된 북측 대표단은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해 온 통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남북대화 때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북측이 선제공격을 한 셈이다. 김영탁 통일부 개성공단사업지원단장을 비롯한 남측 대표단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고 한다.
북측 대표단은 먼저 한국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문제를 꺼냈다. “우리가 이미 전쟁 선포로 간주할 것이라고 밝힌 PSI는 남북관계를 험악한 지경에 몰아넣고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비판의 강도가 세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의 한 관계자는 “원론적인 수준에 상당히 톤을 낮춘 듯했다”고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은 개성공단 계약 변경에 관한 두 가지 요구사항을 밝힌 뒤 공단 사업의 원만한 진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통지문 읽는 것을 끝냈다.
북측은 자신들의 요구사항만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자리를 뜨려 했다. 자칫 ‘북한의 일방적 통지 후 접촉 종료’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남측 대표단은 준비해 온 통지문을 빠르게 읽어가기 시작했다. 북측은 남측의 ‘기습 낭독’에 당황했고, 통지문을 읽는 남측 대표단을 제지했다.
남측 대표단은 더 읽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통지문을 북측에 넘겨줬다. 북측 대표단은 남측이 건넨 통지문을 살펴봤고, 남측 대표단은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때가 오후 8시 57분. 이명박 정부 들어 첫 남북 정부 당국 간 22분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측 개성공단관리위원회로 돌아온 남측 대표단을 북측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는 남측의 통지문을 접수한 적이 없다”며 통지문을 다시 돌려줬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남북 접촉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남측 대표단은 당초 조건으로 제시한 A 씨와의 면담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공식 접촉에 들어간 데다 준비해 간 통지문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북한의 통지문만 손에 들고 돌아온 것은 지나친 저자세였다는 것이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