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성 강조해 지도체제 강화 노린 포석인듯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여야 합의에 따라 6월 임시국회에서 표결 처리하기로 했던 방송법 개정안 등 미디어 관계법안의 처리를 저지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정 대표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보육원 ‘혜심원’을 방문한 뒤 본보 기자와 만나 “미디어 관계법은 반드시 막겠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미디어 관계법은 민주주의와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법”이라고도 했다. 그는 ‘여야가 표결 처리하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약속을 먼저 어긴 것은 저쪽(한나라당)이다. 1월에 한 약속을 뒤집었다”며 “우리는 한 번도 표결 처리를 해준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미디어 관계법은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적인 입장이다”라고 주장했다. ‘1월에 한 약속’이란 여야 3개 교섭단체 원내대표가 1월 6일 ‘방송법을 비롯한 미디어 관계법은 이른 시일 내에 합의 처리하도록 한다’고 합의한 사실을 일컫는 것이다. 또 ‘약속을 먼저 어겼다’는 정 대표의 언급은 당시 상정 시한을 정하지 않았는데 한나라당이 “이른 시일 내에 처리하려면 상정은 해야 한다”며 2월 25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에서 민주당의 동의 없이 미디어 관계법안을 전격 상정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여야 원내대표는 미디어 관계법안이 상정된 뒤인 3월 2일 “미디어 관계법은 문방위에 자문기구인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고 100일간 여론 수렴 등의 과정을 거친 후 6월 임시국회에서 국회법 절차에 따라 표결 처리한다”고 합의했었다.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과 100일간의 여론 수렴은 사실상 민주당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이후 여야 합의에 따라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미발위)’가 구성돼 50일 넘게 의견 수렴과 토론을 벌여왔고 이달에는 지역별 공청회도 예정돼 있다. 그런데도 정 대표는 ‘표결 처리해 준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원내대표 간 합의를 뒤집은 것이다.
한나라당은 정 대표가 합의를 깨려 한다며 발끈했다. 문방위 간사인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어이가 없다.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기는커녕 아무 이유 없이 정책법안을 두고 투쟁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며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법안이라면 왜 그때 합의를 해줬는지 의문이다”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강기정 대표비서실장은 통화에서 “여야 합의를 깨겠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미발위에서 충분히 의견 수렴이 돼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정 대표는 이전에도 합의 파기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들을 연거푸 한 적이 있다. 3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미디어 관계법은) 확실히 막겠다”고 했고, 4일 기자간담회에서는 “6월 국회에서 언론악법을 비롯해 ‘MB악법’을 (어떻게) 잘 막아내느냐가 최대 과제”라고 말했다.
정 대표가 4·29 재·보궐선거 이후 미디어 관계법 저지를 전면에 들고 나온 데는 야당의 선명성을 강조해 현 민주당 지도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2월 국회 당시 당 지도부가 미디어 관계법안을 표결 처리하기로 한나라당과 합의하자 당내 비주류 강경파는 ‘지도부 퇴진’을 요구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었다. 4·29 재·보선 결과 수도권에서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지도부에 대한 반발은 잠복한 상태지만 미디어 관계법안 처리 여하에 따라 반발이 수면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6월 임시국회에서 미디어 관계법 처리를 막는다면 정 대표의 입지는 확고해지지만, 막지 못할 경우에는 지도력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르면서 정 대표의 당내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가 수도권 승리에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정 대표가 이날 기자에게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이 열심히 야당 노릇하라고 한 것 아니냐. 진보 세력의 대표는 민주당”이라고 한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