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대통령 비전-철학 공유하는 인사없어 혼란 키워
지난해 총선 직후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선 “청와대가 텅 비게 됐다”는 말들이 나왔다. 대선 공신이 대거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회에서 입법 활동을 통해 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지원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고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한나라당의 ‘쇄신 내홍’을 둘러싼 친이(친이명박) 그룹의 행보를 보면 분열과 자리다툼의 냄새가 배어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를 당연한 ‘정치의 생리’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경영 컨설턴트들은 ‘측근경영’과 ‘분신(分身)경영’의 차이로 해석한다.
○ 측근과 분신
다국적 컨설팅사인 딜로이트컨설팅 김경준 부사장은 측근을 ‘말 그대로 리더의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리더의 심기와 얼굴을 관찰하며, 리더의 철학이나 목표보다는 리더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측근은 리더의 기분이나 취향을 읽는 데는 빠르지만 리더의 목표와 가치관에는 무심하다. 이익집단에 가깝다.
반면 분신은 리더와 철학을 공유하는 ‘또 다른 리더’다. 리더와 같은 시각으로 목표를 바라보고 성과로써 평가받으며 동일한 철학으로 동질감을 형성한다. 그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경영에 직접 관여하진 않지만 사장단을 통해 조직의 말단에까지 경영철학을 전달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측근의 폐해로 김대중(DJ) 김영삼(YS) 정권 때의 가신그룹을 지목한다. DJ 때 ‘권노갑 2선 퇴진론’으로 불거진 동교동 가신그룹의 대립은 정치적 이념이나 노선의 차이가 아니라 권력의 ‘과실’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를 둘러싼 갈등의 성격을 띠었다. YS 정권 때도 한보사태, YS의 차남 현철 씨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상도동 가신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다 동반 몰락한 사례가 적지 않다.
○ 이명박 정부의 분신은
현 정부에선 과거보다 더 많은 대통령의 ‘정치적 분신’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많다. DJ나 YS 때는 대통령이 정치를 장악하면서 본인의 철학을 직접 주입할 수 있었지만 이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보다는 경제·사회 정책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권 창출의 산실인 안국포럼 출신 중에는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과 김백준 대통령총무비서관 정도만 행정부에 남고 나머지는 대부분 여의도에 입성했다. 노무현 정부 때 386참모 중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의원 정도만 국회에 진출하고 윤태영 천호선 윤후덕 정태호 양정철 전 비서관 등이 청와대에 남아 5년 내내 대통령을 보좌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친이계가 친이재오계와 친이상득계, 친이 직계 등 소(小)계파로 갈리면서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두언 차명진 김용태 의원 등이 최근 ‘7인 성명’을 통해 “대통령의 독선과 오만”을 거론하고, 김영우 의원 등 다른 친이계 의원들은 이에 대해 마뜩하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상득 의원은 대통령의 형이라는 점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2선 후퇴를 선언한 상태다.
다국적 조직·인사관리 업체인 머서코리아 박형철 대표는 “분신으로 표방되는 중간관리자가 곳곳에서 리더의 철학을 전달하는 밸류 에이전트(value agent·가치 전달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현 정부에 그런 인사가 있는지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 분신 못 키우는 리더
정치권에서 분신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선거의 승패에 매달리는 정치문화와 대통령 5년 단임제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박형철 대표는 “표를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선 민심의 변화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시류에 따라 새로운 리더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또 “GE 등 글로벌 기업도 새 리더의 철학을 전파하고 구현하기까지는 10년 정도가 걸린다는 점에서 국가 지도자의 비전을 스며들게 하기엔 5년으론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거론되고 있는 개헌 논의 등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분신 부재의 원인을 리더에게서 찾기도 한다. 다국적 컨설팅사인 한국왓슨와이어트 김광순 대표는 “대통령의 철학이 확실치 않고 ‘국민의 언어’로 비전을 설명하지 못하면 분신이 나올 수 없다”며 “철학의 구현에서도 하부 책임자에게 자율과 책임을 인정해야 하는데, 매사에 대통령이 개입하면 국가 운영 체계가 깨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치권엔 아직도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리더십 콤플렉스’가 남아 있는데, 사회가 분화되고 행정 역량이 높아진 지금은 대통령이 본인의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