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시티홀’ 시청을 중단했다. 이 드라마가 처음 나왔을 때 박 의원의 기대는 컸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치계를 다룬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 의원에게 ‘시티홀’은 정치가 실종된 정치드라마로 보였다. 주인공인 국회의원 후보 조국을 비롯해 정치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정략적이고 계산적인 인물로 묘사돼 자칫 정치 혐오증만 부추길 수 있는 데다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에 초점이 더 맞춰져 당초 표방한 정치드라마가 아닌 멜로드라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청와대와 의원들의 정치 참고서가 된 ‘웨스트 윙’
한나라당 이두아 의원실 인턴 직원의 업무 중 하나는 미국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의 스토리와 정치적 쟁점을 정리하는 것이다. 초선인 이 의원은 “비록 미국 정치상황을 다루지만 정치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며 “나뿐만 아니라 보좌관들과 인턴들도 보게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과 민주당 박영선 서갑원 전병헌 의원도 ‘웨스트 윙’ 예찬론자들이다.
‘웨스트 윙’은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백악관을 중심으로 정계를 다룬 것이다. 시즌9까지 제작된 이 드라마는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리얼리티를 잘 살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총기 소유나 금융법 등 여야 간 갈등이 첨예한 주요 정책을 소재로 양당 간 정치 철학과 정책의 차이로 인한 갈등과 그 해결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12월 청와대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용 계획 수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웨스트 윙’ 시즌 1∼7시리즈를 구입했다고 밝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드라마를 즐겨봐 비서관들이 앞 다퉈 이를 시청하기도 했다.
일본 정치드라마 ‘체인지’도 정치권에선 화제다. 인기스타 기무라 다쿠야가 맡은 35세의 초선 의원 아사쿠라 게이타가 여당 중진들의 음모로 허수아비 총리가 됐으나 그에 굴하지 않는 파격 행보를 다뤘다. 또 다른 드라마 ‘구니미쓰의 정치’는 시장 후보의 비서인 18세 소년이 벌이는 대범한 선거운동 과정을 다뤘다. 코믹한 요소가 섞이긴 했지만 ‘정치개혁’이라는 화두에서 한눈을 팔지 않은 이 작품들은 기존의 정치관행을 깨는 스토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정치’가 실종된 정치드라마 ‘시티홀’
이와는 달리 한국 정치드라마에서 ‘정치’를 배운다는 국회의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결같이 “한국의 정치드라마에는 ‘드라마’만 있을 뿐 ‘정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시장과 시의원 국회의원 후보를 중심으로 정계의 모습을 선보인 ‘시티홀’은 3개 지상파 방송의 수목드라마 중 시청률 1위지만 정작 정치인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이유는 사실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시장과 부시장 사이에서 줄서기에 바쁜 국장들, 10급 공무원을 시장으로 당선시켜 화제를 모으고 이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려는 국회의원 후보, “권력을 쥐려는 건 남용하기 위해서야!”라며 과장된 언행을 일삼는 시의원…. 드라마 곳곳에 정치권에 대한 부정적이고 희화화된 묘사가 널려 있다.
전북 정읍시장 출신인 무소속 유성엽 의원은 “시장과 부시장이 대결 구도를 갖는 등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면서 “작가가 정치 현실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치드라마를 표방하면서도 정치보다는 국회의원 후보와 시장의 로맨스에 맞춰져 있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 때문에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결국엔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로 귀결되는 한국 드라마의 재탕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정치드라마를 내세웠지만 대중의 정치혐오증과 냉소에 적당히 편승하며 남녀 주인공의 러브 라인에 치중한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건국부터 제5공화국까지 다루며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드라마로 꼽히는 ‘∼공화국’ 시리즈도 각 정부의 비사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주요 인물의 권력암투 등 정가 뒷얘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각 정당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고 정책적 차이점은 무엇인지는 흔히 무시되기 일쑤라는 지적이 나온다.
○ 인물 중심의 정당사와 정치 정보 부족
그렇다면 왜 한국 드라마에서는 ‘정치’를 찾아보기 어려울까.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드라마에서의 ‘정치 실종’ 현상은 인물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현대정치사와 정치에 대한 제작진의 정보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는 “미국은 정치 철학과 강령을 중심으로 모인 정당 중심의 정치가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웨스트 윙’ 같은 드라마가 가능하다”며 “반면 일본과 한국은 보스 정치와 부패 스캔들로 인한 정치 불신이 심해 기존 정치 체제에 부정적인 내용을 담은 정치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인들 역시 씁쓸해하면서도 “우리 정치가 1차적 원인을 제공한 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민주당 최재성 의원은 “정치인들이 과장되게 대단한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비칠 때는 속상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군림하고 특권을 누리려 했던 권위적 정치 문화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일 뿐 누구를 탓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한나라당 장광근 사무총장은 “우리 정치문화가 기본적으로 정책이나 이념보다 ‘3김 정치’로 대표되는 인간관계로 형성되다 보니 보스와 충성파에 힘이 쏠렸던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도 “과거 억압적인 정치문화로 오랫동안 정치에 대한 정상적인 소통이 어렵다보니 일어난 결과 같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은 매스컴에 대한 아쉬움도 덧붙였다.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은 “정치에 대한 이미지는 정치인이 50%, 언론이 50%를 만든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과거 사람 중심에서 이제 정책이나 이념 중심으로 정당이 진화하는 만큼 이제는 이러한 부분에도 초점을 맞춰주는 드라마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편으론 부실한 제작 환경이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 드라마를 분석한 ‘미드열전’의 저자 문은실 씨는 “미국은 전문 드라마를 만들 경우 관련 업종 사람들이 수십 명씩 스태프로 참여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사례가 거의 없다”며 “‘웨스트 윙’의 경우 실제 백악관 직원과 정치인들이 제작 과정에 대거 참여했지만 우리나라는 멜로드라마 작가들이 정치드라마도 쓰다보니 리얼리티도 떨어지고 대중의 흥미 끌기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