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4일 방북은 자신의 대통령 재임 말기에 북한 미사일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방북을 검토한 지 9년 만에 이뤄졌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전개되자 당시 북한의 실질적 2인자이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조명록 차수는 그해 10월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 조명록은 대통령을 예방한 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의 협의를 통해 △북-미 간 상호 적대시 정책 배제 △상호 주권 존중 △무력 불사용 △내정 불간섭 원칙이 포함된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채택했다.
조명록은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클린턴 대통령 방북 초청장을 건넸고, 열흘 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를 이끌어내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사전작업이 본격화됐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11월 방북을 통해 북-미 간 수교를 단행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움직임에는 1998년 북한의 대포동1호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미국 본토 안보에 현실적 위협으로 부상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임기 내에 어떤 식으로든 매듭짓겠다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그의 방북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2000년 11월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임기 말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 스스로도 중동 평화 정착과 북한 문제 해결이라는 두 가지 현안을 놓고 저울질하다 중동 문제에 집중하면서 방북은 없던 일이 됐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안을 제시했으나 이 역시 김 위원장의 불응으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2년 당선 이후 2001년 퇴임 때까지 제1차 북핵 위기와 한반도 전쟁 위기 등 북한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에 대북정책 기조를 놓고 한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한국과 보조를 맞춰 대북 포용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1999년 북한의 핵과 미사일문제를 ‘경제제재 해제’와 ‘북-미관계 정상화’로 푸는 포괄적 접근법인 ‘페리 프로세스’를 대북정책의 틀로 채택하기도 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