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좋은 얘기만 하려면 그 끝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한민국이 만 61세가 되는 동안 100개 이상의 국가가 지도상에서 아예 사라져버렸거나 이름을 바꿔 달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대한민국의 끈기와 생존력은 칭찬받기에 일말의 모자람도 없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만 바꿔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향후 새로운 60년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문제점을 적시하고, 또 준비하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음에 놀라게 된다.
자원도 부족하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을 지금껏 살려 왔고 또 계속 지탱할 원동력으로 흔히 경제력과 외교력을 들곤 한다. 그런데 과연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그에 걸맞은 외교력을 지녔다고 국제사회는 평가하고 있을까? 조지 W 부시 행정부 1기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이 얼마 전 인터뷰에서 북한을 가리켜 “그 시스템은 미쳤지만 북한의 협상가들은 내가 다뤄본 이들 중 가장 뛰어나고 끈질겼다”라는 찬사를 던졌다. 과연 우리의 외교력과 협상력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까?
국익수호 위한 치열한 정신을
한일어업협정 한중마늘분쟁 한미쇠고기협상 등 나라 안팎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안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자신의 미진한 부분을 적잖이 발견하게 된다. 작년 5월 촛불집회의 와중에서 이슈화되지는 않았지만 과연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통해 한중관계도 한미관계처럼 ‘전략적’ 관계로 가져가는 것이 좋은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2008년 7월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한 사실을 우리 외교통상부나 주미 공관에서 파악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또 왜일까?
외교당국은 이런 문제가 지속적으로 생기는 가장 큰 이유로 우리 외교인력 규모가 너무 작다는 점을 주로 든다. 그러나 행정안전부 통계를 들여다보면 2000년 1520명이었던 외교부 정원이 2008년에는 2398명으로 50% 이상이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외교 인력은 인구 10만 명당 33.6명으로 일본(42명)이나 미국(58명)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인적 규모가 중요한 변수 중 하나임은 틀림없지만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외교당국이 제시하는 또 다른 변론은 주로 한국의 전략환경이 갖는 특수성에 대한 것이다. 동북아 역내 강국이 곧 세계 강국인 상황을 감안하면 이 또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과 그것이 주는 한계를 그냥 인정하고 말아버린다면 뛰어난 인재와 꿋꿋한 도전정신은 왜 필요할까?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적인 점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국익과 국민을 수호하려는 치열한 ‘정신’을 배양하고 유지하는 일이 아닐까?
여러 가지 사례와 기록을 통해 볼 때 우리 외교는 대체로 지나치게 낙관론에 기반해 운용한 측면이 적지 않다. 물론 외교의 수행에 있어 긍정적 전망과 심리도 필요한 것이지만 국익 수호의 최전선이자 마지막 보루일 수밖에 없는 외교협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낙관론보다는 신중론이 훨씬 더 유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발생 가능한 모든 복합적 상황을 미리 파악해보고 만약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0.0001%라도 될 경우 신중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비하고 대처할지를 치밀히 따지고 또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격 높이는 중장기전략 시급
이를 위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구분된 정치담론보다는 중장기적인 국가이익을 우선 정의하고 이를 중심으로 국격(國格)을 높일 수 있는 외교 전략과 정책의 틀을 차근히 준비해야 한다. 외교당국의 지도부에서부터 국익과 국민의 수호라는 정신에 중점을 두고 의전이나 당일치기에 전념할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 멀리 보고 조금은 더 세부사항을 차근히 챙기는 노력을 ‘제도화’할 때이다.
사실 한국외교는 철학이 부재(不在)하거나 이론적 무장이 덜 되어서라기보다는 조금 더 치밀하게 한 번 더 살펴보는 노력이 부족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만 생기면 버릇처럼 만들었던 그 많은 ‘현안전담팀(TF)’이 지금은 다 어디에서 뭘 하는지 외교 지도부가 한 번쯤 챙겨볼 때가 됐다. 그런 노력이 있어야만 신참 외교관도 신바람과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정재호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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