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 국방부 장관이 청와대에 보냈다는 편지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이 장관은 25일 김병기 대통령국방비서관을 통해 정정길 대통령실장, 윤진식 경제수석비서관, 김성환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게 A4용지 4장 분량의 편지를 전달했다. 내년도 국방예산 삭감 방침을 재고해 달라는 내용으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가 전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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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관은 편지에서 “군의 전력증강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에 국방예산이 감액된다면 군 내뿐 아니라 예비역들의 반발도 예상된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7월 올해 대비 7.9% 늘어난 30조7817억 원의 내년 예산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경상운영비와 관련해 장병들의 복지증진과 복무여건 개선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예산을 삭감하고 무기도입 예산 역시 대폭 줄일 것을 지시해 놓은 상태다.
이 장관은 특히 편지에서 예산 삭감 업무를 주도하고 있는 장수만 국방부 차관의 최근 행동을 ‘하극상’으로 표현하며 비판했다. 장 차관이 당초 11.5% 증액하도록 편성된 방위력 개선비를 5.5% 증액으로 바꿔 이달 초 청와대에 보고하면서 장관인 자신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편지에서 “차관의 행동이 군 내에서는 하극상으로 비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은 내년도 국방예산을 놓고 이견을 보여 왔다. 이 장관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방예산이 7.9%가량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장 차관은 3.4∼3.8% 증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산을 둘러싼 이견보다는 이 장관과 장 차관 사이에 내재됐던 갈등이 예산 문제를 놓고 마침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동안 경제관료 출신인 장 차관이 국방부에 입성한 뒤 ‘실세 차관’으로 불리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경쟁과 갈등이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청와대가 장관을 제쳐두고 대신 차관을 자주 불러 해당 부처의 현안을 상의할 경우 장관이 좋아할 리 없다는 차원에서다.
청와대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장관이 보낸 편지의 내용 일부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청와대의 예산 삭감 방침에 장관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장관이 편지를 보낸 당일 오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렸기 때문에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편지를 보내 이렇게 논란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장관은 장 차관이 장관 보고 없이 삭감안을 결정해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하지만, 장 차관은 청와대에 와서 삭감안을 보고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 간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번 사건으로 이명박 정부가 마치 국방부를 홀대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우려하고 있다.
한편 이 장관의 편지 발송이 자신의 거취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음 주로 예정된 개각에서 이 장관의 교체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옷을 벗고 나가는 마당에 군을 위해 할 말을 하고 나가겠다는 취지에서 편지를 보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퇴임 후를 고려해 군의 목소리를 대변했다는 이미지 관리 차원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이 장관 측은 “외국에서도 당국자들끼리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장 차관은 “이번 논란이 더는 확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만 말했다고 원태제 국방부 대변인이 전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