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우가 특이한 점은 나라님의 장례가 단순한 사자의 장송에 그치지 않고 생자의 세계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아오곤 했다는 사실이다. 좀 거칠게 말해본다면 20세기의 한국사는 거듭된 죽음의 장사가 그때마다 정치 사회적인 일대 변동을 초래했다 해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일제의 강점하에서 한민족의 가장 큰 저항운동은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의 인산(因山·국장)을 계기로 폭발했다. 1919년의 3·1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운동이 그것이다. 광복 후에도 한국현대사의 큰 변동이 이제는 나라님 아닌 이름 없는 시민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의 12년 권위주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은 1960년 4·19혁명은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의 주검을 건져 올리며 폭발했다. 1987년 신군부의 독재 정권이 그 앞에서 6·29민주화선언으로 백기 투항을 한 6월 민주항쟁도 박종철 이한열 두 젊은이의 죽음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죽음’으로 요동친 한국현대사
뿐만이 아니다. 6·25 남침전쟁이 결과한 엄청난 인명의 희생은 광복 후 5년 동안 깊숙이 뿌리를 내린 남한의 좌파 및 심정적인 친좌파 세력을 이후 30년 동안 잠재우게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다 1980년 신군부의 광주 대학살이 몰고 온 ‘국가허무주의’의 광풍은 6·25전쟁 이후 30년의 금기를 깨고 신세대 사이에 새로운 친북 좌파가 다시 남한에서 세력화하는 여건을 마련해줬다. 한편 노동운동이 일절 금압되던 박정희 개발독재 체제하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여 분신한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이 나라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중한 목숨의 죽임을 보고서야 비로소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그리 바람직한 일은 못 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가 계속 피에 주리고 있다고 한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일이다. 민주화의 과정, 그것은 어떤 면에선 뜨거운 감성(파토스), 사람들의 화끈한 열정을 요구하는 연대라 할 수 있다. 분노, 항의, 저항, 온몸을 던지는 거리의 싸움을 그것은 요구한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이제 뜨거운 감성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로고스)이 지배해야 하는 시대다. 서로 이해와 의사를 달리하는 사람끼리 거리에 나가 싸움판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리를 같이해 토론 협상하는 것이 일상적인 민주정치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것이 의회주의의 원리다. 의회의 목적은 “토론을 주먹다짐의 대용품으로 하자는 것”(윈스턴 처칠)이다.
민주주의의 일상에는 화끈한 맛도, 멋도 없다고 볼 수도 있겠다. 죽음, 통곡, 분노, 밤, 촛불, 함성, 살풀이 등 일상세계의 저편을 찌르는 ‘테어트랄’(극적인 것)은 거기 없다. 정치란 원래 일상적 상식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것으로 일궈낸 예술’이다. 유럽의 어느 정치인은 그래서 연극인들의 모임에 나와 정치처럼 ‘가능한 것의 사슬’에 매이지 않고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예술을 부러워한다는 말을 실토하기도 했다.
의사당서 ‘가능한 것’ 일궈내야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나라 여의도의 정치판에선 가능한 것의 한계를 벗어나 거의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예술(?)의 행태’를 보여주었다. 국회의원이 국회 등원을 거부한다. 잠긴 의사당 문을 쇠파이프와 망치로 부순다. 의사당 안에선 남녀의원 가릴 것 없이 주먹다짐을 도로 토론의 대용품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아, 인체적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 의정 단상 위로 날개 없이 날아가는 곡예(곡마단 예술)까지도….
어느덧 청명한 가을이 다시 찾아왔다. 여의도도 다시 싸움터 아닌 원래의 제 모습을 되찾아야 할 계절이다. 그래서 감성 아닌 이성의 정치가 복원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성(로고스)의 정치란 다른 것이 아니다. 말(로고스)로 하는 정치다. 주먹다짐이 아니라 입씨름으로 승부하는 정치다. 체력, 완력이 국회의원의 ‘실력’이 아니라 남을 설득, 설파하는 언변, 입심이 국회의원의 ‘실력’이 되는 정치다. 의사당은 바로 그러한 말을 위해 있는 말의 전당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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