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의원 총선의 한나라당 지역구 공천이 마무리된 지난해 3월 중순의 어느 날 새벽. 예상치 못한 공천 탈락의 쓴잔을 마신 박희태 전 대표는 한 핵심 당직자의 집 앞에서 그가 출근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 전 대표는 남은 비례대표 공천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이 당직자는 “지역구 공천 탈락자를 비례대표로 공천하면 원칙이 무너진다. 다른 기회가 있을 테니 기다려보자”고 위로했다.
이후 박 전 대표는 정치인생 20년 만에 가장 암흑 같은 나날을 보냈다. 1988년 경남 남해-하동에서 당선돼 그 지역에서만 내리 5선을 했던 그는 원내총무와 국회부의장 등 크고 작은 경선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당내에서 2007년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 때 이명박 후보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그가 공천에서 탈락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탈락 소식을 접한 뒤 “기절초풍할 일”이라고 했다.
지난해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재기의 발판이 됐다. ‘당 화합’의 기치를 내걸어 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표가 되자마자 대표실에 ‘태화위정(太和爲政·큰 화합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는다)’이란 글이 적힌 액자를 걸었다. 경선 후유증으로 친이(친이명박)와 친박(친박근혜)계로 갈라진 당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한 것이다. 두루 원만한 친화력은 그의 자산이었다. 실제로 친박계 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입당시키면서 화합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원외(院外)’의 멍에는 깊었다. 원외 당 대표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그의 행보를 제약했다. 당 안팎에선 “실세 대표가 아닌 관리형 대표”라는 평가가 나돌았다. 그는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조용히 혼자 있을 때는 ‘국회의원 배지가 있었다면 당 대표직을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4월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그는 또 다른 시련에 부닥쳤다. 당내 개혁파 의원들은 박 전 대표를 쇄신의 표적으로 삼고 사퇴를 요구했다. 친박 측이 조기 전당대회를 반대하면서 그의 사퇴 문제가 잠잠해지자 친이계로부터 “친박계로 전향한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그는 지난달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독대해 경남 양산 재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고,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14일 양산의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된 뒤 박 전 대표는 기자에게 “공천 축하 전화를 많이 받아 마치 21년 전 처음 국회의원 공천을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양산에 내려와 그를 돕고 싶다는 당내 의원들의 전화도 계파를 떠나 자주 걸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는 10월 28일 선거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여권 후보 단일화가 실패하면 표가 분산될 수 있다는 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김해가 양산에 인접한 점 등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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