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다는 기쁨보다는 미안하고 용서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여태 재가하지 않고 버텨 온 아내를 보게 되는 남편의 심정이 그랬고, 두 살 때 헤어져 지금은 환갑이 지난 딸을 만나게 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랬다. 남측 이산가족들은 26일부터 금강산에서 열리는 추석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가할 최종 상봉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17일 전해들은 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2007년 10월 이후 약 2년 만에 재개되는 이번 이산가족 단체 상봉은 26∼28일 남측 방문단이 북측 가족을 만난 뒤 29일∼10월 1일 북측 방문단이 남측 가족을 만나는 순서로 진행된다. 상봉은 지난해 7월 완공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처음으로 이뤄진다. 최종 명단에 오른 남측 방문단 100명 중 80대가 53명으로 가장 많고, 북측 방문단 100명 중에서는 70대가 76명으로 가장 많았다. 명단은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www.redcros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02-3705-3650∼7
“재혼않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 수절한 아내 만나는 석찬익 씨
“아내가 재가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니 미안한 마음이지요. 지금이라도 아들과 딸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요.” 강원 속초시 조양동에 사는 석찬익 씨(89)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에 들떠 있었다.
석 씨는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에 살다가 1948년 초 장사를 하기 위해 단신으로 월남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됐다. 고향을 떠나올 때 아내 정태연 씨(82)는 21세였고 큰아들 하준 씨(61)는 태어난 직후였다. 석 씨는 “아들은 물론 아내 얼굴조차 가물가물하다”며 “혼자서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석 씨는 남쪽에서 새롭게 가정을 꾸렸고 1남 3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석 씨는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된 뒤로 매번 상봉 신청을 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때마다 관계기관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거나 다음에 꼭 참여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석 씨는 다리가 불편해 바깥출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번 상봉 때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벌써 가족에게 달려가고 있다.
“미안하단 말밖엔 할 말이…”
○ 두 살 때 헤어진 딸
이 씨는 1950년 9월경 인민군 징집을 피해 고향인 황해도 수안군 도소면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 살 아래였던 부인과 결혼해 딸까지 뒀지만 급히 떠나느라 미처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 씨는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헤어져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며 “명절이나 생일 때 특히 생각이 많이 나서 남 모르게 눈물을 많이 훔쳤다”고 말했다. 50여 년 전 지금의 부인과 재혼한 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며 6남매를 뒀지만 북에 남겨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은 켜켜이 쌓였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벌어질 때마다 신청을 했지만 포함되지 않았고, TV 앞에 앉아 눈물만 흘려야 했다.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나게 됐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부인이 이미 사망해 만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평생 얼마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갔을지…. 꼭 한번 다시 만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이 씨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 6남매 중 유일하게 못 데려온 딸
이번 남측 이산가족상봉단 중 최고령인 박양실 씨(96·여)는 “피붙이 그놈이 살아있다니 꿈만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 씨는 1951년 1·4후퇴 직후 고향인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고현리에서 피란길에 오르면서 3남 3녀 중 둘째딸 이언화 씨(61)만 친척집에 남겼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피란길에 갓 태어난 막내딸(영화·59)도 벅찬데 걷지도 못하는 두 살배기를 데리고 나설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다. 국군으로 입대한 큰아들이 전사한 데 이어 개신교 신자였던 남편이 지식층으로 분류돼 처형되자 무작정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나섰다. 남편의 장례식을 끝낸 다음 달 떠난 고향이 58년이 흘렀는데도 갈 수 없는 곳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먹고산다고 딸 생각은 가슴 깊숙이 묻어둔 채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박 씨는 “살아있으리라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도 없었는데 살아있다니 꿈만 같다”며 마른 눈물을 훔쳤다.
춘천=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부산=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