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58년간 품속에 간직해 왔던 빛바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고등학교 2학년의 앳된 소녀였던 셋째 딸 이혜경 씨는 75세 할머니가 됐다. 어머니 김유중 씨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100세 할머니가 됐다. 26일∼10월 1일 금강산에서 열리는 추석 이산가족 상봉행사 참가자 중 최고령이자 유일한 100세 이상 생존자다. 18일 경기 파주시 교하읍 자택에 가족들이 모였다. 8남매 중 둘째 딸 이항복 씨(77)가 혜경 씨의 옛 사진을 보며 “가족들에게도 거의 보여주지 않은 사진”이라고 말하자 가족들이 활짝 웃었지만 김 씨는 물끄러미 사진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1951년 초 서울 성북구 돈암동 집을 나섰던 셋째 딸은 전쟁의 혼란 속에 소식이 끊겼다. 그 뒤 1958년. 남편, 첫째와 다섯째 딸, 여섯째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김 씨는 “(6·25전쟁은) 우리뿐 아니라 온 국민이 당했던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김 씨는 생전에 혜경 씨와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고 한다. 2002년 9월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사위 이우문 씨(당시 70세)를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남쪽 출신인 사위가 가족을 찾으면서 처가 식구도 함께 찾았지만 딸은 상봉장에 나오지 못했다. 한 번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가하면 다시 상봉 대상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김 씨가 힘없이 말했다. “(딸이) 잘 있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2002년 이후에도 대한적십자사에 상봉 신청은 해놓았지만 만날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지난달 남북이 추석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열기로 합의한 뒤 가족들은 정부에 ‘어머니가 100세이시니 추첨 없이 상봉대상자가 될 수는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규정상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뜻밖의 기적이 생겼다. 혜경 씨가 상봉 신청을 해 북측 최종 방문단에 포함된 것이다. 가족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김 씨에게 알렸다. 김 씨는 무표정하게 “기쁜 일이네”라고만 답했지만 가슴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김 씨는 이날 오랜만에 휠체어를 타고 집을 나섰다. 햇볕이 따뜻했고 김 씨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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