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이길걸로 안봤지만 미군감축 등 좋은 표어 만들어… 우리가 잘 싸운다면 다음엔 당선시킬 수도 있다”
《북한은 1971년 6월 이후 대남 평화공세(peace offensive)를 취했으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 다양한 외교 채널을 통해 그 배경과 목적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설명했다. 당시 북한이 남한에 대해 ‘자주·평화·민족대단결 3원칙에 의한 통일’을 추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과는 달리 우방국에는 남한 정부를 국내외적으로 고립시키고 내부 혁명역량을 키워 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음을 설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음은 문서별 중요 내용.》
[김일성 내각 수상이 1972년 9월 22일 정준택 내각 부수상을 루마니아로 보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설명한 내용(자료: 루마니아 외교문서)]
정 부수상은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나는 당신에게 전할 김일성 수상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정 부수상은 잠시 환담을 나눈 뒤 김 수상의 지시에 따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상세한 문제들을 설명하겠다며 루마니아어로 번역해 온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1시 40분까지 진행됐다.
“김일성 동지는 대남 평화공세의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남한을 민주화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한 내) 혁명역량이 빨리 커져야 한다. 둘째, 남한 정권이 우리가 남한을 침공하기를 원한다고 날조 모략하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셋째,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획책하는 미 제국주의의 ‘닉슨독트린’을 폭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싸운다면 박정희가 남북 연방제(북한의 통일방안)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다음 남한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를 축출하고 신민당 후보(1971년 후보는 김대중)를 당선시킬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박정희를 무시하도록 해 그를 더 큰 어려움에 빠뜨리는 것이다. 사회주의 우방 국가들도 남한의 교류 제의를 거부하고 위협해야 한다. 남한이 민주화되면 남한 내 모든 정치 사회 단체들의 활동이 합법화되고 통일혁명당과 혁명역량이 강화돼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 정부를 관철시킬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단합해 남한 땅에서 유엔과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 한반도 통일에 관한 문제가 유엔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통일을 향한 투쟁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혁명과 반혁명, 애국자와 배신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투쟁과 같은 격렬한 계급투쟁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 부수상은 통일혁명당의 생성과 몰락 등 분단 이후 남한 내부에 생성됐던 혁명역량이 스스로의 혁명을 이룰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고 설명하면서 1971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좋은 표어들(mottos)을 만들어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 부수상은 그 예로 △남북한 평화통일 △국군과 미군의 감축 △베트남 철군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외교관계 확대 등 김대중 후보의 공약을 열거했다. 이어 그는 “그가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출마는 남한 내에서 누가 얼마만큼 평화통일을 원하는지 측정하는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만석 북한 외교부 부부장이 1972년 6월 17일 소련과 동독 등 8개국 동유럽 외교관들에게 7·4남북공동성명 등 대남 평화공세에 대해 설명한 내용(자료: 동독 외교문서)]
“우리의 평화공세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분단 정책과 일본의 군국주의 침투를 막고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원조를 받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남한 주민들이 7·4남북공동성명에 환호하면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있으며 세계 여론도 김일성의 노선과 공동성명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노동당은 남한의 위정자들이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투쟁하고 대화와 협상에 나서도록 강제할 것이다. 남한이 미국과 일본에서 그 어떤 것이든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해나갈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남한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사회주의 형제 나라들도 남한 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기대한다. 남한 당국자들을 만나지도 말고 남한을 방문하지도 말고 남한 당국자들이 당신네 나라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 달라. 또 사회주의 우방국들이 국제기구에서 남한과 북한을 동등하게 대해 우리의 투쟁을 지지해 줄 것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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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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