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성통만사’ 60여명, 회화교습 자원봉사
“북한 이해 계기” “외국문화 접할 기회” 서로 만족
서울의 외국계 부동산컨설팅회사에 근무하는 마크 빈크 씨(31)는 3일 오후 부랴부랴 업무를 정리한 뒤 서둘러 시청역 인근의 카페로 향했다. 누군가가 빈크 씨를 반갑게 맞는다. ‘존’이라는 한국인이다. 그는 영어로 안부를 물은 뒤 곧장 한국말이 섞인 서툰 영어로 질문을 쏟아냈다.
“‘우리 제품이 어떤 지역에서는 더 뛰어나다’를 영어로 표현하고 싶어. ‘뛰어나다’는 표현으로 적당한 게 있을까?” “‘superior’가 있지.” “슈페리어?” “아니, ‘슈’ 말고 ‘수’. ‘수피어리어’.”
뉴질랜드 출신의 빈크 씨는 한 달 전부터 존의 영어회화 공부를 돕고 있다. 빈크 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하루는 저녁 시간을 꼭 비워 존을 만난다.
존은 탈북자 이모 씨(31)의 영어 이름. 방송장비 제작업체에서 일하는 이 씨는 2개월 전 해외마케팅 부서에 배치 받은 뒤 고민에 빠졌다. 10년 전 한국에 왔지만 한 번도 외국인과 얘기한 적이 없었다. 짧은 영어 실력도 걱정이었지만 탈북자인 자신을 외국인이 어떻게 볼지 두려웠다.
그러나 북한인권단체 ‘성공적인 통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성통만사)’을 통해 빈크 씨를 알게 된 이후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이 씨는 빈크 씨를 만날 때마다 일주일간 궁금했던 표현을 노트북 컴퓨터에 빼곡히 정리해 온다.
빈크 씨처럼 탈북자들의 영어공부를 돕는 주한 외국인이 늘고 있다. 현재 성통만사를 통해 탈북자들을 돕는 외국인이 60명. 2007년 이후 봉사에 참여한 외국인이 400명을 넘었다. 이를 통해 외국인들은 북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한다.
3년 전 한국에 온 빈크 씨는 외국인이 한국문화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했다. 한국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탈북자들은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자가 어떻게 사는지 몰랐습니다. 존을 만나 탈북자들이 따뜻하고 진심 어린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죠. 존은 나와 공통점이 많은 좋은 친구입니다.”
한국에서 10년 이상 영어강사로 활동하며 영어 번역출판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데이비드 켄달 씨(46)는 매주 수요일 밤 서울 서대문경찰서로 향한다. 켄달 씨는 한 달 전부터 경찰서 2층 회의실에 마련된 강의실에서 탈북 학생들에게 영어발음을 가르치고 있다. 4일에도 켄달 씨가 빨간 헝겊을 혀 모양으로 만들어 모음을 발음할 때 혀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설명하자 학생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켄달 씨는 “탈북 학생들이 한국 학생보다 질문도 많고 더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학생 강모 씨(23·예비 대학생)는 “이전까지 외국인이 멀게 느껴졌지만 만나 보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친밀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dongA.com 뉴스테이션에 동영상
▼ 탈북청년에 어머니가 되어준 경찰들 서울 혜화경찰서 ‘모친과 생이별’ 20대 도와 “기금 만들고 밑반찬 건네고 틈나는대로 전화” ▼
어머니가 담근 김치의 맛이 가물가물하다. 열한 살 때 없는 살림이지만 하나뿐인 아들 생일이라고 어렵게 구해 구워주신 임연수어의 맛도 이젠 거의 잊었다. “경찰서 보안협력위원 분들이 해주시는 김치가 맛있는데요, 뭘.” 어느덧 남한생활 8년차에 접어든 탈북자 김모 씨(23)는 멋쩍게 웃었다.
김 씨는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산 사고로 잃었다. 열 살 때 실질적인 가장이 된 김 씨는 학교 대신 산과 들을 전전하며 땔감을 줍고 식량을 구했다. 지긋지긋한 삶의 끝이 보이지 않자 1998년 가족은 탈북을 결심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체류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세 명은 산에 숨어 지내야 했다. 김 씨의 어머니는 “일단 따로 흩어져 지내다가 1년 후 이 번호로 통화해 다시 만나자”며 전화번호를 건넸다. 그리고 1년, 2년이 지나도록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김 씨는 2002년 중국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주중 캐나다대사관 담을 넘었다.
김 씨는 이후 8년째 혼자다. “아직 어머니와 누나의 얼굴만큼은 생생하다”는 김 씨는 가족을 찾고 싶고 또 찾아야 하지만 사실 지금으로서는 막막하다. 지난해 성균관대에 입학해 어엿한 대학생 명함도 달고 교내 탈북자 동아리 ‘성균둥지’의 회장도 맡았지만 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건강도 좋지 않다. 북한과 중국 생활을 거치며 제대로 못 먹고 못 입어 얻은 늑막염 때문이다.
이런 김 씨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은 것은 다름 아닌 경찰서였다. 혜화경찰서 보안과 경찰들과 보안협력위원들은 김 씨를 위한 지원기금도 만들고 밑반찬, 생활용품 등을 마련해 전달해준다. 김 씨는 “보안협력위원 분들이 수시로 김치와 밑반찬을 전하고 가 냉장고가 비질 않는다”며 “한 위원은 틈날 때마다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 위원은 얼마 전 김 씨를 초대해 ‘따뜻한 집 밥’을 대접하기도 했다. 김 씨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어본 것도 벌써 10년이 넘었는데…”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혜화경찰서는 김 씨가 맡고 있는 동아리의 후원회를 열기도 했다. 김 씨 담당관인 보안과 김대영 경위는 종종 학교에 들러 12명의 성균둥지 회원에게 밥도 산다. 김 씨는 “이제 나는 남한사회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의 꿈은 ‘같은 탈북자들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받은 만큼 베풀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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