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폭력사태로 기소된 민주노동당 관계자 12명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고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운영하는 단체의 후원 모임을 겸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물의를 빚은 서울남부지법 마은혁 판사가 1987년 결성된 사회주의 지하 혁명조직인 ‘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연맹(인민노련)’의 핵심 멤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경찰은 인민노련이 인천 부천지역 공장 근로자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의식화교육을 시켜 왔으며 배후에서 파업을 독려하는 활동을 벌여온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서울대 정치학과 81학번인 마 판사는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 조승수 의원 등과 함께 당시 인민노련의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일부 인사들은 1989년 구속됐으나 마 판사는 적발되지 않았다.
조승수 의원은 1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인민노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조로 남한에서 사회변혁을 이뤄야 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며 “마 판사는 지도부에서 이론교육과 선전 부문의 역할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인민노련 출신으로 민노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통화에서 “마 판사는 당시 핵심 이론가였지만 이미 20여 년 전 일 아니냐”며 “인민노련 출신들이 한나라당에도 몸담고 있는데 그 문제를 판결과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말했다.
마 판사는 인민노련이 제도권 정당화를 꾀했던 1991년 한국노동당 창당에 참여했다. 1992년부터는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정책국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993년 한국외국어대 교지에 실린 ‘민중운동의 개혁과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모색’이란 글을 통해 “군사파쇼정권에서 (김영삼 정부의) 부르주아 체제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목표를 수행하는 투쟁 조건에 변화가 왔다”며 “진보세력의 정치적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진보정당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 판사는 진로를 바꿔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2002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마 판사는 동아일보의 취재 요청에 법원을 통해 언론과 “개인적으로 통화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혀왔다.
마 판사의 한 지인은 마 판사에 대해 “9월 18일 부친이 돌아가시고 10월 7일 아내를 잃는 큰 아픔을 잇달아 겪었다. 노 대표가 두 번 다 문상을 왔는데 마침 노 대표가 출판기념회를 한다는 연락이 와서 답례 차원에서 참석한 것이라고 하더라. 노 대표가 두 번이나 와서 부의금을 내고 갔기 때문에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만 원의 후원금을 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마 판사는 이미 그(인민노련) 활동을 접고 판사를 한 지 오래다. 과거의 활동이 현재의 그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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