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금 ‘돈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경제위기 초기인 1992년에 이어 지난달 30일 다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헌 돈과 새 돈을 100 대 1로 교환해주는 대신 개인별, 가구별 교환 한도를 두고 나머지 돈은 강제 저축을 통해 사실상 국가에 헌납하도록 했다. 이 조치로 시장 상인들이 벌어들인 돈은 휴지가 됐다. 주민들의 장롱 속 달러를 끌어내기 위해 당국이 발각된 달러를 몰수할 것이라는 소식도 흘러나오고 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의 사정은 다르다. 1990년대 이후 쿠바 정부가 화폐개혁을 인위적으로 단행한 적은 없다. 쿠바엔 내화(內貨)인 일반 페소 외에 달러 등 외화와 환전할 수 있는 태환 페소가 있다. 태환 페소와 페소의 교환 비율은 1 대 24로 안정적인 상태다. 쿠바는 2004년 이후 국내에서 달러 등 외화를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외국인 관광객과 해외의 가족에게서 외화를 송금 받은 외국인은 환전소에서 달러당 1 태환 페소의 비율로 바꿔야 한다. 북한과 달리 국가가 외환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쿠바는 1990년대 초 옛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 전환을 하고 원조를 중단하자 모두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졌다. 국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돈을 찍어냈고 그 결과 내화(북한의 원, 쿠바의 페소)의 가치가 떨어졌다. 시중에 돈은 풀렸지만 국영상점에 상품이 공급되지 않자 시장이 크게 번창했고, 여기서 거래되는 상품의 내화와 달러 가격이 동시에 폭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쿠바와 북한의 대응 방식은 달랐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두 나라의 대응 방식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위기를 겪었음에도 20년 후 상황이 크게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쿠바는 위기의 현실을 인정하고 조기에 솔직한 대응 방식을 내놓았지만 북한은 위기를 외면했다. 쿠바는 경제논리로 대응했고 북한은 정치논리를 앞세웠다.
쿠바는 위기 초기인 1993년 개인의 외화 보유 및 사용을 합법화했다. 해외에 가족을 둔 쿠바인들은 송금 받은 달러를 은행에 예금하거나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국가는 이들이 사용하는 달러를 흡수해 경제회복에 활용했다. 쿠바는 또 외국인 관광 및 투자를 활성화하고, 자영업과 시장 허용을 골자로 한 제한적이지만 과감한 개혁을 통해 1990년대 말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결과 2004년 외화사용 금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북한은 본질적인 처방을 하지 않고 1992년 땜질 처방에 불과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가 실패했다. 북한의 미온적인 대응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더 큰 경제위기를 불렀고 인플레이션과 달러화 현상은 심화됐다. 북한은 2002년 7월 임금과 물가를 동시에 인상하는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단행해 실물경제를 살리려고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 당국자는 “이번 화폐개혁은 이것도 저것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 당국이 꺼내든 마지막 카드”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최근 북한 당국이 노동자 농민에게 새 돈을 찍어 나눠주는 것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전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정은의 후계 구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합리성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김석진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화폐개혁을 한 뒤 다시 새 돈을 과다하게 찍어내면 인플레이션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화폐개혁에 따른 새 달러 환율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어 이번 조치 역시 치밀한 계획 없이 졸속으로 단행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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