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내부에선 날 선 공방 계속
이경재 “정몽준 발언 자제해야”
권태신, 박근혜 ‘신뢰론’ 비판
“그(세종시) 얘기는 안 하겠습니다.”(정운찬 국무총리)
“그렇다면 우리도 굳이….”(친박계의 한 의원)
정 총리가 3일 낮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한 식당에서 한나라당 부산·울산 지역 국회의원들과 마주 앉았다.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안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 지역별 의원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이날 오찬엔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는 친박(친박근혜)계 의원 7명을 포함해 의원 16명이 참석했다. 당초 이날 오찬에선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날 선 공방이 예상됐으나 세종시 문제는 거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로 정 총리는 친박계 허태열 서병수 유기준 의원 등을 의식한 탓인지 ‘세종시’라는 단어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참다 못한 친박계 좌장 김무성 의원이 나섰다. 김 의원이 “(총리가) 세종시 수정안의 취지와 내용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만든 자리가 아니냐. 그렇다면 왜 총리는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하나”라고 따졌고 정 총리는 “그 얘기는 안 하겠다. 설도 다가오고 해서 의원님들께 인사도 드리고, 지역 현안 문제도 들으려고 한다”라고만 말했다. 정 총리는 오찬이 끝날 무렵 “총리 입장에서는 세종시 문제가 빨리 해결됐으면 한다. 충청지역민들도 많이 지쳐 있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3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회의에 참석한 뒤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정 총리는 “규제를 풀어 투자를 활성화하고 고용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김경제 기자
정 총리가 세종시 문제를 거론하지 않자 굳이 식사 자리에서 민감한 세종시 문제로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지난달 27일 정 총리가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을 총리공관으로 초청한 오찬에는 박종근 의원을 제외한 대구지역 친박계 의원 8명이 아예 불참했다.
3일 총리 주재 오찬 장소는 전날 급하게 국회 근처 여의도로 바뀌었다. 그동안 다른 지역의원들과 오찬은 총리공관에서 열렸다. 이와 관련해 부산시당위원장인 친박계 유기준 의원이 “국회 회기 중인 데다 의원들을 오라 가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으니 오찬을 하겠다면 국회 근처에서 하자”고 총리실에 요구해 관철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여권 내부 공방은 이날도 계속됐다.
친박계 중진인 이경재 의원은 이날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서 박 전 대표에게 ‘말펀치’를 날리는 정몽준 대표를 향해 “가급적 당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발언은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비판했다. 이에 정 대표는 “세종시(문제)는 당내에서 충분히 대화해야 한다. 또 언론을 통한 대화는 좋지 않다”고 응수했다.
권태신 총리실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친이(친이명박)계 모임인 ‘함께 내일로’의 세종시 토론회에 참석해 “신뢰는 올바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충청도 등을 나쁘게 만드는 것을 갖고 신뢰를 내세우는 것은 지도자,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바른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친박 의원들은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신뢰’를 강조하는 박 전 대표를 비판한 것”이라고 흥분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靑, 친박 공략에서 무기명 투표로 선회 “친박 의원들에게 소신 바꾸라고 말할 단계 지나”▼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여권 내 계파 갈등이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오히려 증폭되는 경향을 보임에 따라 청와대의 수정안 처리 해법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한계에 봉착한 만큼 박 전 대표의 자장(磁場) 내에 있는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이 의결과정에서 각자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내려고 모색하고 있다.
청와대 핵심 참모는 3일 “친박 의원들에게 ‘소신을 바꾸라’고 말할 단계는 지난 것 같다. 박 전 대표가 원안 고수 방침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한 친박 의원들이 수정안에 찬성표를 던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는 곧 맨투맨식 설득에 치중해왔던 지금까지의 전략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청와대가 생각하는 플랜B(원래 계획이 무산됐을 때의 대안)는 수정안 처리와 관련한 ‘절차적 해법’인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 의원들이 박 전 대표의 견해를 ‘계파 내 당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도라면 표결 절차를 통해 자기 소신대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여권 관계자는 “절차적 해법에는 무기명 투표와 같은 방법도 포함될 수 있다”며 “박 전 대표의 눈치를 보지 않고 표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수정안이 처리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일각에선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자산이자 수정안 반대의 명분인 ‘원칙론’을 박 전 대표 측에 역으로 요구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당과 대통령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한나라당 당헌 제8조는 ‘당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적극 뒷받침하며 그 결과에 대하여 대통령과 함께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고 돼 있다. 이는 책임여당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한 것으로 당은 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적 의제를 충실히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 규정대로라면 친박 의원들의 수정안 반대 및 대정부 비난 행위는 당헌 위배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청와대는 또 충청권 주민들의 바닥 정서가 수정안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고 보고 이를 표면화시킬 수 있는 ‘격발 장치’를 찾는 데도 고심하고 있다. 청와대의 다른 참모는 “충청권 여론조사를 보면 원안 고수 비율이 여전히 높지만 지식인 그룹 등을 중심으로 수정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바닥 민심도 수정안을 용인하는 기류가 보이는데 이 지역에서 그런 목소리를 대변할 통로가 없다”며 “잠재된 여론을 어떻게 밖으로 끄집어낼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충청권에 한나라당 의원이 송광호 최고위원 한 명뿐인 데다 그나마 친박계여서 여론 수렴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전술적 궤도 수정이 여의도 정가에서 작동할지는 의문이다. 친이(친이명박)계 내부에서조차 마뜩잖아 하는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 한 친이 직계 의원은 “국회의원이라면 자신의 표결에 책임을 진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 무기명은 떳떳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의원은 “끝까지 설득해 보고 정 안 되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역사적 명분을 갖고 물러서면 된다. 무리해서 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세종시 문제를 4월 임시국회에서 매듭지을 계획이다. 세종시 논란이 지방선거 이후까지 계속되면 국민들이 ‘이슈 피로감’을 겪게 되고, 이는 국정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