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3일 금강산관광지구 내 남측 정부 부동산 5건을 몰수하고 민간 소유 부동산을 동결하기로 한 데 대해 정부는 북한이 넘어서는 안 될 ‘레드라인’을 넘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정부 당국자들이 지금까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강력한 대응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은 이번 조치를 통해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법 절차를 위반했음은 물론 남북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형국이다. 북한이 이 조치를 실행에 옮기고 정부가 맞대응할 경우 천안함 침몰 사건까지 겹친 남북관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암흑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전망된다.
○ 재산권-계약안정성 침해한 불법행위
정부는 그동안 북한이 금강산에서 남측 부동산 등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은 국제관례와 당국 간 합의, 당자사 간 계약을 위반하는 불법행위라는 점을 여러 차례 밝혀 왔다. 이번 조치는 ‘모든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민법의 기본원칙을 침해한 것이자 국제조약의 성격을 띤 ‘남북투자보장합의서’를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남북이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그해 12월 16일 체결한 이 합의서는 제4조에서 남북은 자기 지역 안에 있는 상대방 투자자의 투자자산을 국유화 또는 수용하거나 재산권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공공의 목적에 따라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예외를 두고 있지만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라는 북측의 귀책사유에 따라 발생한 관광 중단은 예외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북한이 현대아산 등 관광지구 내 민간 소유 부동산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남북 양측의 사업자인 현대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1998년 체결한 ‘금강산관광을 위한 계약서’ 등 사적 계약도 위반한 것이다. 또 북측의 조치는 2002년 11월에 제정된 뒤 2003년에 수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강산관광지구법’ 등 북한이 관광사업을 위해 스스로 제정한 내부 법령도 위반한 것이라고 통일부 당국자는 지적했다.
○ 남북한의 정치적 갈등 폭발한 듯
북한의 이날 조치는 예상된 것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발표된 듯하다. 특히 박임수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장 등 군부 인사들이 부동산 시찰을 명분으로 금강산을 방문해 관광 코스를 돌아보던 도중 갑자기 명승지개발지도국이 담화를 발표한 것은 북한 최고지도부가 실무진의 계획을 앞당겼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따라 북한 지도부가 이명박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의 불꽃놀이에 대해 “정신 차려야 한다”고 밝힌 것에 자극받은 나머지 대남 공세의 속도를 높인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담화는 이 대통령을 거명해 “감히 우리의 태양절 기념행사까지 시비하는 무엄한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남측에 더 이상 아량과 관용을 베풀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북측의 이날 조치에 대해 남측 정부도 ‘맞대응’ 태세를 갖춰 남북관계는 당분간 공세와 맞대응의 악순환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날 조치가 발표된 뒤 정부 당국자들의 태도에서는 금강산 문제를 대화로 푸는 방식을 포기한 듯한 결연한 의지가 감지됐다. 실제로 정부는 북한의 금강산 공세에 대한 단계별 대응책을 마련한 상태였으며 이날 ‘북한에 영향을 주는 조치’를 언급함으로써 그 실행을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부는 개성공단사업을 제외한 남북 경협사업과 민간 교역의 중단 또는 제한, 북한 상선의 제주해협 통과 불허, 개성공단을 제외한 북한 지역의 민간인 방문 불허 등 남북 인적교류 중단, 시급한 인도적 지원 물품을 제외한 대북 물자제공 중단 등 다양한 대응 방법을 놓고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계약파기 → 새 사업자 찾기’ 쉽지는 않아 中관광객 유치 가능하지만 한국인 안가면 돈벌이 타격▼ ■ 北의 다음 수순은 북한이 23일 이미 동결된 금강산 지구 내 정부 자산을 몰수하고 민간기업의 자산마저 동결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11년 5개월여 만에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됐다. 특히 북한이 이날 ‘금강산 관광길이 영영 끊기게 된 것’이란 표현을 사용하자 금강산관광이 완전 중단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 기로에 선 남북교류의 상징
1998년 11월 18일 남측 관광객 882명을 실은 관광선 ‘금강호’가 동해항을 출발하면서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대표적인 남북 교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유람선을 이용해 바닷길로 가던 금강산관광은 2003년 2월 남북을 잇는 육로가 완공됨에 따라 육로 관광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관광객 수도 급증해 2005년 6월에는 누적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했고 2008년 7월 관광이 중단될 때까지 총 193만4662명이 금강산을 방문했다.
금강산관광이 이어지는 동안 곡절도 많았다. 현대아산이 초기에 관광 대가로 북한에 6년간 9억4200만 달러(약 1조550억 원)를 지급하기로 해 ‘퍼주기’ 논란이 일었다. 현대아산은 실제로 3년간 4억8600만 달러를 지불했으며 그 후에는 관광객 수에 따라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99년 6월 관광객 민영미 씨 억류사건으로 40여 일간 관광이 중단되기도 했다. 두 차례의 연평해전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던 금강산관광은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 씨가 새벽 산책에 나섰다가 북측 초병에게 피살되면서 중단돼 지금의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관광 중단이 계속되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2009년 8월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하고 북측과 금강산관광 재개에 합의했지만 남북 당국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 북한, 계약 파기 수순 밟을 듯
북한이 지금 같은 초강경 기조를 이어간다면 다음 수순은 동결한 남측 민간 기업 소유 부동산에 대해서도 몰수를 선언하고 최종적으로 관광계약을 파기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측이 현대아산과 체결한 금강산 사업 관련 계약서에는 일방적으로 계약 파기를 할 수 없게 돼 있다.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계약 당사자인 현대아산과 협의를 해야 하고, 양측이 접점을 찾지 못할 경우 중국 베이징에 있는 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에서 중재 절차를 거치도록 계약서상에 명시돼 있다. 현대아산과 결별한 뒤 새로운 해외 사업자를 찾아야 하는 북한으로서는 이런 절차까지 무시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사업자를 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당장은 중국 관광객을 동원해 금강산 관광 재개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우리 정부를 압박하는 차원에서 교포 기업가나 중국 기업가들을 상대로 현 정부 임기가 끝나는 기간에만 관광사업을 하는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자를 구하는 게 쉽지 않고, 사업자를 구하더라도 한국 관광객이 가지 않는 이상 관광객이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북한이 금강산 관광길을 끊겠다고 위협은 해도 실행에 옮기기는 힘들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재정상태가 최악인 북측의 입장에선 금강산 관광이 중요한 외화 획득원이기 때문이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정부 소유 598억원… 관광공사는 900억 현대아산 투자액은 2268억 민간포함 총5000억 넘을듯▼ ■ 몰수-동결자산 얼마나 북한이 23일 자신들이 소유하거나 새 사업자들에게 넘기겠다고 밝힌 부동산은 이산가족면회소와 소방서, 문화회관, 온천장, 면세점 등 5개이며 이들 시설에 정부와 한국관광공사가 투자한 금액은 모두 1498여억 원이다.
정부 소유인 이산가족면회소와 소방서 등 2곳 건설에만 각각 550억 원, 22억 원이 들었다. 이산가족면회소는 남북 적십자회담 합의에 따라 지어졌으며 지하 1층, 지상 12층 규모로 공사비 전액을 남측이 부담했다. 객실은 206개이며 연회장과 면회사무소 등을 갖췄다.
소방서는 정부가 남북협력기금을 투입해 지은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이며 고가사다리차, 물탱크차, 펌프차 등을 갖추고 있다. 2007년 9월 착공해 다음 해 7월 완공했지만 고 박왕자 씨 피격사건이 발생하면서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다.
한국관광공사 소유의 부동산은 온천장 355억 원, 문화회관 300억 원, 온정각(전체의 36% 소유) 245억 원으로 총 90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이 몰수당한 셈이다. 여기에 정부가 금강산 관광지구 내 설치한 관광도로 비용 26억6000만 원을 더하면 몰수된 총자산 규모는 약 1498억6000만 원으로 늘어난다.
정부와 한국관광공사 측 자산 외에 동결된 민간 자산은 훨씬 더 많다. 이 가운데 현대아산이 투자한 규모는 약 2268억 원. 현대아산이 투자한 현지 시설물은 부두와 도로, 해금강호텔, 온천장, 금강산 옥류관 등이다.
현대아산 측에 따르면 협력업체들의 투자금도 1329억 원으로 추산된다. 2005년에 문을 연 금강패밀리비치호텔은 일연인베스트먼트가 투자했으며, 호텔 근처에 조성된 금강산골프장은 에머슨퍼시픽그룹이 지었다. 국순당, 대가 등 주류 식음료 업체의 시설 투자 규모는 28억 원, 훼미리마트 등 유통업체는 19억여 원을 투자했다. 현대증권 등은 홍보 부스를 만드는 데 8억 원을 들였다. 이에 따라 정부(한국관광공사 포함)와 민간이 북측에 몰수 및 동결당한 자산은 5000억 원을 훌쩍 넘는다.
게다가 현대아산은 시설 투자 외에도 2002년부터 2052년까지 금강산 관광을 위한 토지 임차와 사업권의 대가로 북측에 4억8669만여 달러(약 5512억 원)를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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