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정치인들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다준다. 승장(勝將)은 달라진 정치적 위상과 함께 ‘대통령선거로 가는 길에서의 우위 확보’라는 전리품을 챙기고 패장(敗將)은 책임론과 함께 그늘로 밀려나는 게 정치판의 법칙이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이변이 많았던 6·2지방선거에서도 주요 정치인들은 성적표에 따라 부침을 겪게 됐다. 여당 지도부는 참패의 책임을 지고, 야당 지도부는 승리의 과실(果實)을 챙기게 됐다. 차기 대선을 향해 달리는 정치인들에게도 이번 선거는 큰 변곡점이 됐다. 여야 정당을 이끄는 주요 정치인들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짚어봤다.》
▼ 박근혜 ▼
‘선거 뒷짐’ 안팎 비난속 일각선 차기 당대표 맡아 당 쇄신-선거지휘 목소리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6·2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에 머물렀다. 다른 지역의 지원 유세 요청을 거부한 채 달성군 한나라당 후보 지원 유세에 집중했다. 박 전 대표가 유세 강행군을 벌이자 대구 경북지역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까지 지원 유세에 동참해 “달성이 친박의 성지가 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지원한 후보는 대구MBC 보도국장 출신인 무소속 김문오 후보에게 패했다.
박 전 대표는 3일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을 통해 “(후보에 대해) 당원들이 결정한 것도 존중하고, (군수 당선자에 대해) 달성군민들이 판단한 것도 존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달성군수 선거의 패배는 일과성 선거 결과로 그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위상에도 부정적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몸살이 날 만큼 강행군을 했음에도 안방에서 자신이 지원한 후보가 패배한 것은 그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이유에서다. 당내 일각에서는 “공천 과정에서 지역 민심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박 전 대표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판세가 뒤집어지기 어려웠다”는 평가도 있다.
친이(친이명박)계 주류 진영도 박 전 대표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지역구 선거 결과는 오히려 부차적이라는 얘기다. 당 지도부의 한 핵심 의원은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박 전 대표가 일찌감치 이번 선거에서 당 차원의 지원유세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거리를 둔 만큼 근본적으로 선거 패배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했다.
친박 진영 내에서도 박 전 대표의 ‘위기’로 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일부 친박계 인사들은 박 전 대표의 유세지원 거부 방침에 대해 “그럴 필요가 없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었다. 선거 지원을 통해 당내 인사들과의 접촉면을 넓혀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스스로 선을 그어 외연 확장의 기회를 차단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이번에 가장 패배한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라는 말이 있다”며 “이 대통령의 경우 4대강 사업과 경제회복 노력 등이 평가절하됐다고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어떤 이유에서든 선거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이 뼈저리다”고 말했다.
친박 진영은 친이계 주류 진영의 공세에 깔린 정치적 음모를 지적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이날 한나라당의 패배와 관련해 “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도 선거 패배의 책임은 선거지원을 하지 않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정부의 일방통행식 운영 때문이라는 점을 에둘러 강조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친박 진영은 친이계가 박 전 대표 없이 지방선거에 승리하면 “이제 박근혜의 시대는 끝났다”고 역공에 나설 계획을 갖고 있다가 선거 참패로 무산됐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친박계의 한 핵심 관계자는 “한나라당이 참패한 지역의 민심을 다독이며 당을 이끌어 갈 지도자가 박 전 대표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 아니냐”는 주장을 폈다. 그런 만큼 박 전 대표가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친박계 내부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현 당 지도부가 선거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 자연스럽게 박 전 대표가 그 공백을 메워 당 쇄신을 주도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다. 2012년 대선 고지를 앞두고 전열 정비에 나서야 할 때라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공식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정현 의원은 “지금은 당이 선거 패배에 대해 뼈아프게 반성하고 실질적인 당의 쇄신을 할 때”라며 전대 참여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 정몽준 ▼
사퇴 카드로 책임론 확산 차단 “당권 재도전 결정 안해” 여지 남겨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는 6·2지방선거 결과가 한나라당 참패로 나오자 상당히 실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선거 직전 각종 여론조사 결과 ‘낙관론’이 확산되면서 당내 분위기가 느슨해진 것을 패인으로 보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3일 새벽까지 한잠도 자지 않고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선거 결과를 지켜본 정 대표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 나와 대표직 사퇴 카드를 먼저 던졌다. 평소 신중한 정 대표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속도감 있는 결정이었다. 당내 일부에서 터져 나올 책임론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정 대표가 이번 선거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준 증거였다.
당초 예상을 크게 빗나간 이번 선거 결과로 정 대표 측이 구상해온 정치 일정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나라당이 기대만큼의 성적을 얻었으면 정 대표는 이달 말에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무난히 대표에 선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친이(친이명박)계 주류 진영의 지원도 예상돼 순항이 점쳐졌다.
정 대표가 당 대표 재선고지에 오르면 ‘승계 대표’의 한계를 벗어나 당 장악력을 높이는 공간이 마련될 것으로 예상됐다. 당내 유력한 차기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에 맞서 주류의 지원을 받는 차기 주자의 위치를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지방선거 패배 책임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의 전당대회 연착륙 구상도 어려워진 것이다.
당내에선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 그가 한 달여 만에 다시 전대에 나서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정 대표의 한 측근은 3일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뒀다.
서울 경기의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승리한 선거를 참패라고는 보기 힘든 만큼 시간이 흐른 후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승계 대표로서 한계가 많았던 만큼 전대에서 당원들에게 심판을 받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한 정치적 선택이라는 논리도 나온다. 친이계가 당장 내세울 적당한 대표감이 없는 당내 현실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사퇴 의사를 밝힌 정 대표는 3일 밤늦게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출국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으로서 현지에서 FIFA 회의를 주재하고 2022년 월드컵 대회 한국 유치 활동 등을 벌이는 일정이 예정돼 있다. 현지에서 15일 귀국할 때까지 향후 정치적 행보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을 것으로 보인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 정세균 ▼
예비 대권주자 유리한 고지에 “전략부재 드러나” 당내 견제도
6·2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함에 따라 선거 사령탑이었던 정세균 대표의 위상은 크게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민주당이 인천 강원 충청에서 광역단체장을 배출한 것은 처음인 데다 전국 단위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이후 6년 만이다. 또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둔 시점이어서 정 대표의 차기 당권 도전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평가가 많다. 예비 대권주자로서의 입지가 강화됐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선거 이전부터 정 대표와 각을 세워온 정동영 의원이나 경기도지사 단일화 작업에 사활을 걸었다가 김진표 민주당 후보의 본선 진출 실패로 곤혹스러운 처지가 된 손학규 전 대표의 입지가 줄어든 것도 정 대표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사실 이번 선거의 투표함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정 대표는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이었다. 민주당이 참패할 것이라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정 대표는 그동안 선거 과정에서 빚어진 700여 건의 공천 재심 요청, 경선 불발 등에 따른 전략 및 지도력 부재 논란의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쓸 뻔했다. 특히 비당권파는 선거가 끝나기만 하면 누적된 여러 책임을 물어 정 대표에게 사퇴 요구와 함께 7·28 재·보궐선거 전에 전당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조기 전대론을 본격 점화시킬 태세였다.
그러나 이제 정 대표는 언제 전당대회가 열리든 일단 당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으로 보인다. 반(反)정세균을 기치로 한 쇄신모임이 당초 3일 열려고 했던 모임을 긴급 취소하는 등 비당권파 측도 속도조절에 들어간 분위기다.
하지만 비당권파를 중심으로 당내 일각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가 정 대표 등 지도부가 잘해서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국민들의 이명박 정권 견제 심리가 강하게 작동하면서 수반된 반사이익의 성격이 크므로 선거 승리가 정 대표의 입지 강화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게다가 서울과 경기의 광역단체장을 한나라당에 내줬다는 점에서 책임론의 불씨를 안고 있다. 강봉균 의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서울과 경기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대승하고도 두 곳의 광역단체장을 놓친 것은 지도부의 공천 실패, 전략 부재를 반영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박지원 원내대표가 공식 제안한 집단 지도체제(당 대표 및 최고위원의 통합 선출)로의 변경 문제, 천안함 사건 초기 대응 실패에 대한 책임론도 언제든 수면으로 떠오를 수 있다. 정 대표가 당내 기반이 그다지 탄탄하지 않은 점도 변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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